안양천 산책로에 봄이 내려앉으면, 작은 생명들이 저마다의 빛깔로 그 계절을 노래합니다. 작은 꽃들은 봄의 선물처럼 다가옵니다. 보랏빛 제비꽃의 수줍은 미소, 복사꽃의 화사한 인사, 개나리의 밝은 황금빛, 벚꽃의 화려한 꽃비, 그리고 조팝나무의 순백의 노래가 어우러져, 산책길을 걷는 순간마저 한 폭의 봄날 그림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보라색을 좋아했기에 보랏빛 제비꽃에 눈이 갑니다. 보랏빛 제비꽃의 수줍은 미소를 마주한 순간, 마치 누군가가 살짝 귀띔하듯 속삭이는 봄의 비밀을 엿본 듯했습니다. 초록 잎 사이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민 그 작은 꽃잎은, 누군가의 볼처럼 부끄럽게 붉어질 것만 같았고, 햇살에 살짝 젖은 그 보라빛은 마음 한구석을 간질이는 듯한 설렘을 전했습니다. 살짝 바람이 불면 제비꽃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라도 하듯 흔들리고, 그 모습은 마치 처음 사랑을 알게 된 소녀가 부끄러워 피식 웃는 장면 같았습니다. 조용하고도 선명하게, 그 보랏빛 미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봄의 향기와 함께 마음속에 가만히 내려앉았습니다.
봄의 부드럽고 수줍은 보랏빛에서, 여름의 짙고 깊은 보랏빛을 상상해봅니다. 봄이 물러나고 여름이 오면, 안양천 산책로는 또 다른 빛깔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초록이 짙어지고 햇살이 더욱 선명해지는 그 길 위에서, 저는 여전히 보라색을 찾아 걷습니다.
여름날의 태양이 대지를 가득 채울 무렵, 그 속에서도 가지꽃은 한낮의 열기에도 아랑곳없이 잔잔한 자태를 지킵니다. 짙푸른 잎들 사이에서 살짝 몸을 낮춘 보랏빛 꽃잎은 흡사 햇살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연보랏 그림자 같습니다. 그 꽃잎 끝마다 새겨진 노란 꽃술은 마치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여름의 고요한 의지처럼 반짝이고, 바람이 불면 살짝 흔들리는 모습은 잠깐의 망설임 끝에 말을 거는 듯한 조심스러움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맥문동은 한층 더 깊고 서늘한 보라색으로 여름의 그림자 속에 피어납니다. 늘 푸른 잎 사이로 고개를 내민 작은 보랏빛 알알이 맺힌 꽃들은 마치 여름 저녁 무렵, 그늘 속에서 속삭이듯 피어나는 노래 같습니다.
다소곳이 줄지어 선 모습은 고요하면서도 단단한 기품이 있고, 햇살이 스치면 보랏빛 구슬들이 살짝 빛을 머금는 듯 신비롭게 반짝입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면, 맥문동은 어쩐지 뜨거운 계절 속에서 조용히 피워낸 여름의 시(詩)처럼 다가옵니다. 강렬한 여름 속에서도 차분함을 잃지 않는 그 보랏빛은, 봄의 설렘과는 다른 깊이 있는 평온함과 여운을 전합니다.
자주색, 보라색은 이상하리만치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무렵을 떠올립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좋아하는 한 가지 색으로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망설임 없이 보라색으로 비행기를 그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과제는 어쩌면 일종의 심리 테스트였는지도 모릅니다. 당시에는 보라색이 정서적 불안을 상징한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물론 보라색이 꼭 정서적 불안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만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라색은 오히려 황제, 권위, 명성, 존엄성을 상징해 왔습니다. 고대부터 19세기 초까지 보라색 옷은 왕실 사람이나 교황, 추기경들처럼 특별한 신분을 지닌 이들만 입을 수 있었습니다. 신분과 권위를 나타내는 색이었습니다.
피터 폴 루벤스의 작품 중에 <헤라클레스의 개와 보라색 발견>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해변에서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던 중, 개가 파도에 밀려온 바닷달팽이를 깨물어 부쉈고, 그 입과 코가 보라색으로 물든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렇게 해서 천연 보라색 염료인 티리안 퍼플(Tyrian purple)이 발견되었고, 이 염료는 극히 소량만 생산되었으며 워낙 값이 비싸 왕이나 귀족들만 사용할 수 있었기에 임페리얼 퍼플(Imperial purple)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외향적 심리를 나타내는 빨강과 내면으로 향하는 구심적 심리를 나타내는 파랑이 혼합된 색이 보라색입니다. 색상 자체만으로도 고고한, 세련된 이미지를 줍니다.
지미 핸드릭스, 프린스, 데이비드 보위 같은 예술가들이 예술적 영감이나 아티스트적 감각을 표현할 때 연관 짓는 색도 보라색이었습니다.
지미 핸드릭스의 1967년 <Purple Haze> 제목 그대로 ‘보라색 안개’를 말하는데, 현실과 환상,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허무는 듯한 사이키델릭 사운드와 가사는 당시의 환각적 음악 세계를 상징합니다.
프린스의 1984년작 <Purple Rain> 그의 대표곡이자 영화 제목, 앨범 제목이기도 하며, 그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든 곡입니다. ‘보라색 비’는 사랑, 상실, 구원, 치유의 감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데이비드 보위는 보라색을 특정 곡에서 주제로 삼진 않았지만, 그의 무대의상, 앨범 커버, 뮤직비디오, 공연조명에서 자주 보라색을 활용했습니다. 성(性), 정체성, 우주, 영성 등 경계 없는 예술 세계를 표현할 때 보라색과 같은 중성적이고 몽환적인 색채를 효과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구 총 130여 명이 거주하는 신안군의 반월·박지도는 마을 지붕과 목교, 꽃, 심지어 주민들의 옷이나 생활용품까지 섬 전체를 온통 보라색으로 뒤덮어 일명 '보라색 섬'으로 알려져 관광지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보라색 마케팅 전략이 주효해 CNN 등 많은 주요 세계언론사는 '사진작가의 꿈의 섬’이라고 극찬하고, 얼마 전 유엔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반월도·박지도와 두리마을은 2007년 퍼플교를 비롯해 지금까지 205억원을 들여 보라색을 주제로 주민들과 함께 퍼플섬을 조성했습니다. 섬에 자생하는 보라색 도라지 군락지와 꿀풀 등의 생태적 특성을 고려해 보라색 섬으로 컨셉을 정했습니다.
또한, 보라색은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색상이기도 합니다. 레드가 상징하는 여성과 블루가 상징하는 남성을 결합하여 만들어진 게 보라색입니다.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색상입니다.
페미니즘은 영국에서 여성이 선거권을 얻기 위한 투쟁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18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여성의 권익 신장을 논하는 사회적 운동입니다. 오랜 역사와 주장, 이해관계 등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간단히 생각할 수 없는 거대한 화두, 논쟁거리입니다.
페미니즘의 선구자로는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주장한 영국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꼽히며, 에멀린 팽크허스트, 헬렌 켈러 등은 서프러제트였습니다. 서프러제트는 20세기 초 영국과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버지니아 울프도 유명한 페미니스트였고, 장 폴 사르트르와의 계약 결혼으로도 유명한 시몬 드 보부아르도 <제2의 성>이라는 저서를 통해 현대의 페미니즘을 성립하는 데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이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손꼽힙니다.
1908년 3월 8일 여성 노동자들이 미국 러트거스 광장에서 생존권과 참정권을 요구하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인 것에 기원을 두고 세계 여성의 날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날 여성에게 선물한 보라색 장미가 페미니즘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됐습니다.
페미니즘은 범위가 매우 광범위합니다. 가부장적인 봉건제도 철폐를 주장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 계급 제도 철폐를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남성성을 우월하게 만드는 사회적 통념을 없애려는 급진적 페미니즘, 여성 해방과 자연 해방을 동시에 추구하는 에코 페미니즘 등이 있고 그 밖에도 보수주의 페미니즘 외에 여러 가지 분파가 갈리게 됩니다. 사회과학을 바탕으로 바라보는 다양한 의견들 때문에 페미니즘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서로 공유하는 이론도 있고 공유하지 않는 이론도 있기 때문에 간단히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닙니다. 성평등을 지향하기는 해도 페미니스트라기보다는 휴머니스트입니다. 인류애. 인간의 가장 위대한 정신입니다.
페미니즘이나 휴머니즘은 얼핏 보면 서로 다른 철학처럼 느껴지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평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 둘은 다른 출발선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비슷한 지향점을 향해 나아갑니다. 페미니즘은 '누구나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가진다'는 휴머니즘의 정신을, 젠더라는 구체적인 영역에 적용한 사회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