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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온기로 빛나는 삶





지난주 목요일 오후 1시, 오래된 지인들과 점심을 함께했습니다. 사십여 년을 함께 살아낸 만열 형과, 동기인 종호와 안양의 <한근집>에서 등심과 한치살을 곁들여 낮술 한잔을 나눴습니다. 평일 낮술이라니. 젊은 날엔 상상도 못 했던 일입니다. 그땐 늘 시간에 쫓기고, 어딘가를 향해 달려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 삶에 이런 여백도 생깁니다. 좋은 나이입니다.




이젠 불안정한 내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닥을 걷는 불안이 사라지니,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문득 십여 년 전, 배우 김희애가 ‘힐링캠프’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스무 살 때는 마흔이 되면 행복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런데 막상 되어보니 좋더라고요. 20대의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걷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말이 참 낯설면서도 위로가 되었죠. 젊고 아름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할 배우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게, 오히려 더 깊게 다가왔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도 그 시절엔 늘 막막했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고, 마음은 늘 초조했죠.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기준에, 늘 내 삶을 끼워 맞추려 애쓰던 시절이었습니다.




예전에 한 은행장이 아들에게 쓴 편지가 문득 떠오릅니다. 아들이 “아버지는 이제 어떤 재미로 인생을 사시나요?”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답니다. “나이 들어가는 것도 청춘만큼이나 재미있단다. 그러니 겁먹지 말거라. 사실 청춘은, 청춘 그 자체 빼고는 다 별거 아니란다.”




이제는 저도 그 말을 이해합니다. 지금의 저는, 젊은 날보다 훨씬 자유롭습니다. 삶이 주는 사소한 기쁨들—평일 낮의 한가한 술 한잔, 오랜 친구의 웃음, 불안 없는 하루의 저녁—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청춘은 찬란했지만, 지금의 고요한 따뜻함은 또 다른 이름의 행복입니다.




세 사람의 대화 소재는 자연스럽게 탄핵 인용으로 넘어갑니다. 종호가 말했습니다.

"탄핵 인용이 나오기까지의 헌법재판소의 선고 지연이 전 국민을 너무도 불안하게 했었는데, 참 다행스럽게도 탄핵이 인용됐어." 그 말에 제가 맞장구합니다.

"그렇지. 나는 이번 대통령의 파면을 통해 그래도 우리나라의 국가 기능 시스템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상 작동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해. 헌법재판관 여덟명 전원이 40대0으로 파면을 인용하고, 한덕수 권한 대행의 차기 헌법재판관 지명을 9대0으로 효력 정지 가처분 인용을 했다는 것이 그래도 국가 기능이, 민주주의가 정상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계엄이 선포되자 국회로 몰려가 군인을 막았던 시민들, 군경의 소극적인 행위가 계엄을 막은 거지. 홍장원 같은 제대로 된 보수도 있고, 수방사 1경비단장 조성현과 김형기 특전 대대장 같은 참된 군인도 있고. 특히나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 대행 같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돼." 특히나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 대행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인사청문회의 장면들.




27년 동안의 법관 생활에도 재산이 6억7천에 불과한 데에 특별한 이유라도 있냐는 백혜련 의원의 질의에서 "결혼할 때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액수도 아버지 재산하고 합친 것이고 자기만의 재산은 4억 조금 못 되는 정도라며, 이것도 통계에 따른 평균 재산인 3억을 넘어서서 반성한다고 답했습니다.

헌법재판관의 임기를 마치고도 전관예우의 현실을 인정하면서 영리 목적의 변호사 생활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문형배 재판관의 중학교 졸업사진은 많은 감명을 줫습니다. 수줍은 얼굴에 짧게자른 머리카락, 교복살 형편이 안되어 다른 사람의 교복 즉 사촌의 교복을 입고 찍은 중학교 졸업 사진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의 이름이 박힌 교복은 없었지만 그의 이름이 새겨진 역사는 영원할 것입니다.




문형배는 사실 김장하 선생이 안 계셨다면 자신은 판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 말씀을 실천하는 것 그것을 잣대로 삶을 살아왔다고 했습니다.

문형배는 고등학교 2학년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독지가 김장하 선생으로부터 학비를 지원받았다고 했습니다.

법관이 된 후 김장하 선생님께 고맙다고 인사를 갔더니 '나에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자신은 이 사회에 있는 것을 너에게 주었을 뿐이니, 혹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아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며 자신이 사회에 조금의 기여를 한 게 있다면 그 말씀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김장하(金章河, 1944년 1월 16일 ~ ) 선생은 경상남도 사천시 정동면 노천마을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교육자, 시민운동가입니다. 그의 삶은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김장하 선생은 동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가정 형편상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한약방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한약업에 입문했습니다. 1962년 한약업사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1963년 사천군 용현면에 '남성당한약방'을 개업하였습니다.




1973년 진주로 한약방을 이전한 후, 김 선생은 1983년 사재를 들여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이후 1991년, 학교를 국가에 헌납하며 공립으로 전환했습니다. 그는 학교 설립과 운영에 약 100억 원의 사재를 투입하였으며, 이를 통해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또한, 김 선생은 장학금 지원, 지역 언론 후원, 인권 및 시민단체 지원 등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을 펼쳤습니다. 특히, 2000년에 설립한 남성문화재단을 2021년에 해산하면서 남은 기금을 경상국립대학교 발전 기금으로 기탁하였습니다.




김장하 선생은 선행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자세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등록금, 하숙비, 생활비 등을 지원하였으며, 이러한 지원은 대부분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삶은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로 제작되어 2022년에 방영되었으며, 이후 영화로도 개봉되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김장하 선생의 삶은 진정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사회에 환원하며, 조용한 실천으로 지역사회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교훈을 줍니다.




어른 김장하 선생은 척 피니Chuck Feeney)라는 미국의 기업인이자 기부왕으로 유명한 자선가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는 평생 모은 재산의 99%, 약 8조 원을 기부한 인물이었습니다. “부자라고 해서 한 번에 두 켤레의 신발을 신을 수는 없다.” 그의 말은 단순했지만 묵직한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의 선행 뒤에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차가 없어 병원에 갈 수 없는 이웃을 위해, 우연을 가장해 차를 태워주던 어머니. 도움을 주는 행위 그 자체보다, 도움을 받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척 피니는 어머니를 통해 배웠습니다.

척 피니의 말처럼, 우리는 결국 3만5천일을 살 뿐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짧은 삶을 얼마나 의미 있게 채우느냐일 겁니다.




문형배 재판관, 김장하 선생, 그리고 척 피니라는 세 인물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살았지만, 묘하게도 같은 결의 온기를 품고 있는 사람들처럼 느껴집니다. 이들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속에 생기는 감정은, 묵묵한 등불 하나가 어둠 속에 놓인 길을 은근히 밝혀주는 듯한 느낌입니다. 누군가는 박수받을 일을 했는데도 박수 대신 침묵을 택했고, 누군가는 부유함을 가졌음에도 그 부유함이 자기 손에 오래 머물게 하지 않았습니다.




문형배 재판관의 중학교 졸업 사진은 왠지 흐릿한 흑백 사진 속의 소년이 현실로 걸어 나올 것 같은 생생함을 줍니다. 이름 없는 교복, 수줍은 얼굴, 그러나 그 속에 단단히 새겨진 결심.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말에는 단순한 검소함을 넘은, 삶의 철학이 느껴집니다. 그가 보여준 단호하면서도 따뜻한 선택들—전관예우를 거부한 자세, 평균보다 많은 재산에 대해 "반성한다"고 한 말—그 모든 것은 한 인간이 자기 신념에 얼마나 진실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뿌리에는 김장하 선생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생각하면, 마치 겨울 아침, 얼어붙은 마당 위에 첫 햇살이 내려앉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조용하지만 깊게 스며드는 따뜻함. ‘사회에 갚아라.’는 말은 무게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무게 없음이 오히려 더 무겁게 다가옵니다. 그 말은 계좌 이체가 아닌, 삶으로 갚아야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김장하 선생이 한약방을 시작해 학교를 세우고, 조용히 장학금을 주고, 시민 운동을 하고, 재단을 국가에 기탁하며 사라지듯 뒷걸음친 삶은,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깊게 각인됩니다. 선생의 삶은 ‘어른’이라는 말이 얼마나 묵직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척 피니. 그는 우리가 익히 아는 ‘기부왕’이라는 타이틀보다, “기부는 투명성이 아니라 온도로 해야 한다”는 말로 더 오래 남습니다. 이 말은 마치 누군가의 손을 꼭 잡아주며,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들립니다. 기부는 숫자가 아니라 체온이라는 그의 믿음은,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 가장 섬세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남습니다.



문형배, 김장하, 척 피니. 이 셋은 각기 다른 세계에서 같은 질문을 품고 살아온 사람들 같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리고 그 대답은 화려하거나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진심으로, 자기 자리에 충실하게. 그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쩌면 우리가 진짜 부러워해야 할 것은 젊음도, 명예도, 돈도 아닌 ‘품위’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이 들어가며 깊어지는 사람의 얼굴, 삶의 주름 속에 새겨진 이야기들, 그 고요한 따뜻함이야말로, 우리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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