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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포탄의 총성, 김익상의 의열 투쟁




1922년 3월 28일, 상하이 황포탄(黃浦灘). 황포강 강물 위로 비스듬히 내리쬐는 오후 햇살이 서양 건물들의 유리창을 때리며 황금빛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공공 조계 지역의 거리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 건물들이 우뚝 솟아 하늘과 맞닿아 있었는데, 화강암 벽면에는 'HSBC', '도이체 은행' 같은 간판이 영문과 한자로 번쩍였습니다.

건물들 사이로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은 아직 켜지지 않았지만, 각국의 상점에서 내뿜는 빛깔 찬란한 천 조각과 광고 포스터가 바람에 펄럭였습니다.

프랑스식 발코니에는 빨간 제라늄 화분이 매달려 흔들렸고, 영국령 건물 앞에서는 검정 양복을 입은 신사들이 파이프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손짓으로 시세를 주고받았습니다.




황포탄의 거리는 다양한 국적과 신분의 사람들이 뒤섞인 곳이었습니다. 세련된 양복을 입고 지팡이를 든 영국 상인, 터번을 두른 인도인 노동자, 전통적인 창파오(長袍)를 입은 중국인 중개상, 그리고 조용히 거리를 걸어가는 일본군 장교까지.

길 한편에는 땀에 젖은 중국인 인력거꾼들이 외국인 고객을 태우려고 손짓하고 있었고, 반대편에서는 서양식 마차가 바퀴 소리를 내며 도로를 가로질렀습니다. 신문을 손에 든 서양인 기자들이 바삐 걸어가고, 일본 헌병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거리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부두는 마치 거대한 야생마가 숨을 헐떡이는 듯했습니다. 증기선의 굵은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하늘을 뒤덮었고, 화물선에서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등에 면포 포대를 짊어지고 다리 판을 오르내렸습니다.

커다란 목재 상자 위에서 쉬고 있는 마부들과, 작은 손수레를 끌며 바삐 움직이는 행상들도 이곳의 흔한 풍경이었습니다.




언뜻 보면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오후 같았습니다. 하지만 곳곳에서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황포탄 부두는 평온함과 혼돈의 경계에 서 있었습니다. 필리핀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하는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의 도착을 알리는 기적 소리가 울리자, 철모를 쓴 일본군 병사들이 부두를 에워싸고 총검을 번뜩였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고, 눈동자는 군중 속 이상한 움직임을 캐치하려 사방을 훑고 있었습니다.

공공 조계 지역의 서양식 건물들 사이로 휘날리는 각국 기 아래, 경비병들의 발걸음이 딱딱거렸습니다. 민간인들은 호기심에 몸을 내밀었지만, 일본군의 날카로운 고함에 뒤로 물러났습니다. 바람에 실려 온 소금기 섞인 강바람이 모든 이의 옷자락을 휘날렸습니다.




의열단원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은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3월 28일 다나카 기이치가 상하이에 도착하면 배가 선착하는 황포탄에서 하선하자마자 곧바로 오성륜이 첫 저격을 맡아 다나카 기이치를 사살하고, 만일 실패할 경우 김익상이 뒤를 맡아 다나카 기이치를 사살하는데, 김익상마저 실패할 경우 군중 속에 숨어 있던 이종암이 폭탄으로 다나카 기이치를 폭사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오후 3시 정각. 여객선이 부두에 닿았고, 다나카 기이치가 함선에서 내렸습니다. 주변에는 일본군과 헌병들이 촘촘히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다나카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바로 그때. 오성륜이 군중 속에서 재빨리 권총을 꺼냈습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지만, 그는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탕!

그러나 그 순간,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미국인 여성(스나이더 부인)이 다나카에게 악수를 청하려고 다가섰습니다. 총탄은 그녀의 등에 박혔고, 그녀는 작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습니다. 등에 붉은 피가 번져나갔습니다. 군중 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다나카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뒤로 넘어졌습니다.

오성륜의 손이 덜덜 떨렸습니다. 총구에서 피어오른 화약 연기가 코를 찔렀고, 귀엔 비명과 일본군의 고함이 뒤섞여서 들렸습니다.

"실패했다. 내가… 무고한 사람을…" 죄책감이 목구멍을 조르며,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권총을 쥔 채 뛰는 모습이 일본 경찰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팔이 잡히는 순간, 그는 하늘을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오성륜의 총성이 울리자, 김익상은 골목 너머에서 몸을 숙였습니다. 다나카가 자동차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젠 내 차례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귀를 맹맹하게 했습니다. 두 발의 총알을 쐈지만, 다나카의 모자만 허공에 휘날렸습니다. "젠장!" 그는 발을 구르며 뒤돌아 뛰기 시작했습니다. 뒤쫓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중국인 마차꾼이 덮쳐오자, 그는 본능적으로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마차꾼의 비명이 들리자 손이 얼어붙었습니다. "죄송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어."

구강로(九江路)를 헤매다가 오인 사격으로 살해된 미국인 여성의 남편인 영국 경찰 톰슨과 마주쳤을 땐 이미 이성이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총구가 톰슨의 가슴을 향했고, 그는 자기 몸에도 총알이 박히는 걸 느꼈습니다. 피가 옷깃을 적시며 쓰러질 때, 그는 허공을 향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끝인가…?"




그 사이, 이종암은 몸을 낮춘 채 다나카가 탄 자동차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손에는 폭탄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깊은숨을 들이마셨습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그는 힘껏 폭탄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폭탄은 그대로 땅에 떨어졌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불발이었습니다. 순간, 이종암의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이럴 수가….’ 그는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곧바로 외투를 벗어 던지고 군중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황포탄에서의 암살 작전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품었던 조국을 향한 결의는 결코 꺾이지 않았습니다. 비록 거사는 실패했지만, 세 사람의 투쟁은 훗날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어 다시금 타오를 겁니다.




철창 너머로 새어 들어오는 가늘한 빛이 김익상의 얼굴에 드리웠습니다. 코와 입가에 마르지 않은 피가 굳어 검은 껍질이 되어 있었고, 왼쪽 눈은 부어오른 틈새로 희미하게 동공이 번뜩였습니다. 쇠사슬에 묶인 손목은 벌겋게 문드러져 살갗이 들떴습니다. 방 안은 탄 냄새와 쇳내가 섞여 공기를 짙게 뒤덮고 있었습니다.




"네놈의 배후가 누구냐?" 일본 헌병 대장이 김익상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쥐며 소리쳤습니다. 그의 눈빛은 날카롭고, 목소리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습니다. 옆에 서 있던 헌병 하나가 시뻘건 쇠막대를 불길에서 꺼내 들었습니다. 쇠끝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며 공기 중에 타는 쇳내가 번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사건, 그것도 네놈 짓이었지?" 김익상은 헛웃음을 지었습니다. 얼굴을 살짝 들어 올리며 핏기 어린 이를 드러냈습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날 두들겨 패도... 난 말 안 해." 그 순간, 뜨겁게 달궈진 쇠막대가 그의 허벅지를 스쳤습니다.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 몸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살 타는 지독한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끄으윽...!"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았습니다. 일본 헌병들은 다시 그를 잡아 벽에 내던졌습니다. 철제 의자에 구겨진 몸이 충격을 받고 무너졌습니다. 헌병 대장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부하들에게 손짓했습니다.

"다시 묶어라. 놈이 자백할 때까지 끝내지 않겠다." 한참을 더 두들겨 맞은 뒤, 결국 김익상의 숨소리는 거칠어졌고,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그는 온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래." 일본군 헌병들의 눈빛이 번뜩였습니다. 대장은 다가가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강제로 고개를 들어 올렸습니다.

"뭐라고?"

"내가 던졌다… 조선총독부에. 사이토 마코토를… 죽이려고." 방 안이 순간 정적에 휩싸였습니다. 김익상의 입에서 뱉어진 고백은, 천둥처럼 울려 퍼졌습니다. 헌병들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했습니다. 한쪽에서는 승리를 확신한 듯 미소를 짓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놈을 즉각 본국으로 이송해라! 더욱 철저히 취조해야 한다!" 그러나, 피투성이가 된 김익상의 눈빛은 아직도 굳건했습니다.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맺혀 있었습니다. 마치 그는 이미 모든 것을 감내한 듯한, 결코 꺾이지 않을 투사의 얼굴이었습니다.




김익상(金益相, 1895년 6월 25일~1941년 8월)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입니다. 김원봉 단장의 의열단원으로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와 육군 대장 다나카 암살 시도를 하였습니다. 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었지만 일제 식민 통치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한 사람은 김익상뿐이었습니다.



김익상.jpg 김익상 의사



김익상은 1895년 한성부 서서 용산방 공덕리계(현재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에서 목재 상사를 경영하던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개신교 계열 학교에서 교직에 종사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광성연초공사(廣城煙草公司)에서 기계 감독으로 일했습니다.

1920년 6월 펑톈(奉天, 봉천) 광성연초공사 지점으로 전근되었을 때 비행사가 되고자 광동의 비행학교로 갔으나 중국 내란으로 폐교되어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김원봉(金元鳳) 단장의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였습니다.




1921년 9월 9일 단장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2개와 권총 2정을 건네받고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져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齋藤 實)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제의 경계가 삼엄하여 김익상 의사는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양복 속에 폭탄과 권총을 감추고 9월 10일에 북경을 떠나 11일에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에도 의사는 일경의 눈을 속이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가는 일본 여자와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면서 교묘히 부부 행세를 하여 기차 안에서 검문을 피했습니다. 폭탄과 권총을 몸에 지니고 있어 여러 가지로 행동이 불편했지만, 남대문 역에서는 동행하던 일본 여자의 3살짜리 아이를 안고 무사히 나올 수 있었습니다.




9월 12일 오전 10시 20분경 전기 시설 수리를 위해 온 것처럼 대담하게 조선총독부 청사로 들어가 먼저 2층에 있는 비서과(秘書課, 총독실로 오인)에 폭탄을 던지고, 이어 회계과(會計課)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지 않았으나 회계과에 던진 폭탄은 일시에 광음을 내며 폭발하자 여러 명의 일본 헌병들이 놀라 뛰어 올라왔습니다. 의사는 이들에게 “2층으로 올라가면 위험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유유하게 조선총독부 청사를 빠져나왔습니다.

이날의 거사가 대단했던 것이 일제의 물샐틈없는 경비가 한순간에 뚫려 식민 통치의 심장부가 공격당한 사실입니다.




결국 사이토 마코토 총독 처단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조선총독부가 폭탄 폭발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빠져나간 김익상은 곧바로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의열단원들은 거사 이후 자결이나 사형으로 순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가 살아서 돌아오자 의열단에서는 그에게 "본분을 다했으니 앞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계속 의열 투쟁을 하겠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사이토 마코토 처단에 실패한 김익상은 1922년 3월 말 다나카 기이치 육군 대장이 필리핀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의열단으로부터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라'는 임무를 받게 되었습니다.

김원봉과 논의 끝에 ‘명사수’로 알려진 오성륜이 제1선에서, 그리고 김익상이 제2선에서, 마지막으로 이종암이 제3선에서 순차적으로 권총과 폭탄으로 다나카를 응징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의거 직후 오성륜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김익상은 피신 중 추격하던 영국 경찰 톰슨이 쏜 총탄에 손과 발에 맞아 중국 순경에게 붙잡혔고, 이종암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피신 중에 벌어졌던 일화는 의열투쟁이 어떤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김익상은 피신 중 중국 순경이 달려들자 그에게 총탄을 발사하였는데, 그것은 그를 향해 발사한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발사하였던 것입니다. 그 이유를 의사는 재판정에서, “우리에게 아무 관계도 없는 중국인을 죽일 필요는 없고, 오직 위협하기 위하여 쏜 것이오. 하늘을 향해 쏘았던 것은 사실”이라고 하면서, 그때 총 쏜 흉내를 내며 웃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재판장이 “오성륜의 탄환이 다나카 기이치 대장에게 맞았으면 그대는 폭탄을 던지지 아니할 생각이었느냐고 물으니, 아니요, 탄환이 맞더라도 나는 나의 폭탄을 다나카 기이치에게 던지려고 작정하였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열투쟁입니다. 침략자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응징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것이 바로 의열투쟁입니다.




김익상은 앞서 체포된 오성륜과 함께 일본 영사관에 소재한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1922년 5월 19일 상하이에서 소위 절도, 폭발물 취체규칙 위반, 건조물 파괴, 살인미수 및 상해치사 등의 혐의에 대해 예심이 종결되어 나가사키재판소에서의 공판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9월 오성륜은 감옥 문을 부수고 탈옥하는 데 성공했지만 불행하게도 김익상은 탈옥에 실패하여 결국 일본 나가사키로 이감되기에 이릅니다.

그는 같은 해 11월 6일 나가사키공소원에서의 1심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이어 1923년에 있었던 상고심에서는 하늘이 도왔는지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습니다.




1936년 8월 2일 가고시마형무소에서 출옥하였습니다. 귀국 후 조카 김기복(金基福)의 이태원 집에 머물렀으나 일본 형사에게 연행된 뒤 소식이 끊겨 생사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의 최후에 대한 이강훈 독립지사의 회고에 의하면 용산경찰서 연행 중 한강에 투신해 생을 마감하였다고 합니다.

사후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봉안되었습니다.




오성륜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의열단의 단원이었습니다. 이후에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장제스의 국민 혁명군과 힘을 합치고 일본군 등에 맞서 무장투쟁을 했으며 동북항일연군의 군수 처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1941년 일본에 체포된 후에는 변절하여 만주국에서 활동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후 내몽골 자치구의 굴라크에서 맞아 죽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영국 경찰 톰슨은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불운하게 아내를 살해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일본 사법당국에 '김익상을 관대히 처리해 달라'고 진정서를 넣었다고 합니다.




다나카 기이치는 1920년 간도참변의 기획자입니다.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한국인사회, 항일단체, 학교, 교회 등을 초토화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일본군은 1920년 10월부터 1921년 4월까지 수많은 한국인 마을을 대상으로 방화·약탈을 일삼고 한국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하였는데, 이 사건을 일컬어 ‘간도참변’이라 합니다.

<독립신문>에 따르면 간도참변으로 한국인 3,700여 명이 피살되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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