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4월 5일, 그날 아침 연해주는 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얼었던 강물은 서서히 풀리고 있었고, 해삼(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한민학교에서는 조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교정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침, 하늘은 검은 포연으로 찢겼고, 아이들의 웃음은 대포의 포성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쾅——!”
시계는 오전 9시 30분. 일본군의 대포와 기관총이 도시를 향해 불을 뿜기 시작했습니다. 해삼, 이만, 소왕령(보로쉴로프), 하바롭스크… 연해주의 주요 도시마다 불길이 솟구쳤습니다. 사람들은 눈을 의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신한촌의 골목마다 불꽃과 피비린내가 뒤섞였습니다. 여자,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집 밖으로 뛰쳐나온 이들은 총검에 찔려 길바닥에 나뒹굴었습니다. 도시는 짧은 시간 안에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피난길은 없었습니다. 일본군은 골목마다 숨어 있던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끌고 갔습니다.
한민학교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이 숨었던 교실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교사들과 학생들은 외마디 비명을 남긴 채 재로 변해갔습니다. 학교 지하에 잠복해 있던 애국지사들은 모두 끌려 나왔습니다. 그 중엔 최재형이 있었습니다.
그는 피난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인을 돌보던 마지막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함께 활동하던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도 있었습니다. 손목이 결박된 채 그들은 어두운 창고로 끌려갔습니다.
이틀 뒤, 4월 7일. 일본군 장교는 조선어를 비틀며 말했다.
“너희들, 소련 공산주의자와 한패지? 독립? 웃기는군.” 최재형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혁명가가 아니다. 조선의 백성일 뿐이다. 너희가 불태운 건 집이 아니라, 역사의 증인들이야.” 말이 끝나자 일본군은 그의 얼굴을 발로 찼습니다. 그러고는 창고 뒤편,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야산으로 그들을 끌고 갔습니다. 거기엔 이미 피로 젖은 땅, 묻힌 흔적들, 그리고 비밀스러운 총소리가 남겨진 자리였습니다.
“최후의 말은 없는가?” 최재형은 짧게 숨을 고르더니, 목소리를 낮춰 중얼거렸습니다.
“나는 대한의 혼이다. 나를 죽여도, 이 민족의 불꽃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는 하늘을 바라봤습니다. 그가 사랑하던 아이들, 그가 지켜내려 했던 수백의 이름 없는 조선 백성들의 얼굴이, 그 속에 어른거렸습니다.
총성이 울렸고, 연해주의 대지에 또 하나의 불꽃이 꺼졌습니다. 재판도 없이. 하지만 그날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습니다.
1920년 4월 7일, 그날은 조선 민족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로 남았습니다. 조선인의 해방을 위해 평생을 바친 직업적 혁명가 최재형, 그와 함께 장렬히 순국한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은 이름 없는 무덤 속에서도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었으나, 조선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최재형의 죽음이 있기 한참 전인 1909년 10월 27일 하얼빈 헌병사무소, 조사실의 일입니다.
방은 싸늘했습니다. 습하고 차가운 바닥, 벽에는 일본제 제식 화기(日本製 制式 火器, 일본군이 공식적으로 채택한, 일본에서 생산된 군용 화기)가 정렬되어 있고, 붓과 먹이 놓인 책상이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얼빈의 늦가을은 벌써 살얼음이 서려 있었고, 창문 너머로는 얼어붙은 송화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안중근은 수갑을 찬 채로 조사실로 들어섰습니다. 그는 침착하고 또렷한 눈빛으로 조사관을 응시했습니다. 헌병대 조사관은 고위 관등을 지닌 중좌였습니다. 이름은 나가사키 류이치(長崎 龍一), 도쿄에서 급파된 엘리트 요원입니다.
“자네의 이름은?”
“대한국인 안중근이다. 자는 응칠, 본관은 순흥이며,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좋다. 어제 이토 공(伊藤公)을 저격한 자가 자네가 틀림없나?”
“내가 쏘았고, 나는 내 손으로 조선을 죽인 원흉에게 죗값을 묻고자 했다.”
조사실 안에 짙은 정적이 흘렀습니다. 조사관은 안중근의 당당함에 순간 눈썹을 찌푸렸습니다. 곧 책상 위의 서류를 펼쳤습니다.
“자네 혼자의 소행이라 보기 어렵다. 배후에 누가 있는가? 혹은 지령을 내린 자는?” 안중근은 머뭇거림 없이 답했습니다.
“김두성(金斗星) 대인이다. 팔도(八道) 총독으로, 자주독립을 위해 흩어진 의병과 열사를 이끄시는 분이시다.”
“김두성이라…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는 누구인가?”
“그분은 실로 20여 년을 조선 독립을 위해 몸 바친 분이다. 백성을 먹이고, 군자금을 댔으며, 나라 잃은 백성의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나가사키는 펜을 내려놓고 물었다.
“그 이름이 진짜인가? ‘김두성’은 가명이지 않은가?” 안중근의 미소 지으며 답했습니다.
“그분의 본명을 내가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그분은 사라지는 사람이 아니라, 조선이 독립되는 날, 다시 세상 앞에 설 분이다.”
조사관은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안중근의 어조는 확신에 찼고, 결코 혼자의 망상이 아니란 것을 느꼈습니다. 기록관이 연신 붓으로 조서를 쓰는 소리만이 방안을 채웠습니다. 조사관은 고개를 들어 그를 다시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왜 하필 이토 공인가? 자네의 총탄은 제국 일본 그 자체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나?”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을 병탄한 원흉이며, 한일병합을 사주한 죄인이다. 조선의 군대를 해산하고, 황제를 겁박했으며, 우리 백성에게 치욕을 안겼다. 그는 국제법상 처단되어야 할 전범이었다.”
그 말에 방 안의 공기가 정지된 듯했습니다. 안중근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정의의 심판을 내린 자다. 나를 죽이려거든 죽여라. 그러나 내 총탄의 의미를 왜곡하지는 말아라.” 조사관은 결국 침묵했습니다. 안중근은 곧 사형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조서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피의자 안중근은 자칭 '김두성'이라는 인물을 배후로 지목하며, 이는 대한의 독립을 위한 상징적 존재라 하였음. 실체 불명.
이름 모를 ‘김두성’. 그러나 후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 이름 뒤에 있었던 이가 최재형이라 증언하게 됩니다. 연해주의 큰 별,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키우고 먹이고 재우며 길을 밝혀주었던 인물.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안중근에게 군자금을 주고, 러시아 조계에서 활동을 도운 그 숨은 인물. 그날 안중근이 조사실에서 쏘아올린 ‘김두성’의 이름은, 실로 일본 헌병대가 두려워한 민족망명의 큰 별이었습니다.
최재형은 1860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가난한 소작농 아버지 최홍백(崔弘百)과 기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당시 천하게 여겼던 기생인지라 노비의 아들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집안 자체는 그저 가난한 농민 집안이었습니다.
1869년 가족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여 지신허(地新墟)에 정착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러시아 상선 선장 부부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어와 문화를 익히며 성장하였습니다.
성인이 된 최재형은 러시아에서 군수업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그는 번 돈의 대부분을 한인 사회를 위해 사용하였으며, 한인 학교 설립, 교회 건립 등 교육과 복지에 힘썼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는 '시베리아의 페치카(난로)'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최재형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한인 사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다양한 조직과 활동을 통해 항일운동을 주도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최재형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의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이 단체는 교포들의 단결과 애국심을 고취하며, 항일 무장단체로서의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이범윤의 창의회와 제휴하여 무장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자신의 소유지를 제공하여 의병기지를 건설하고, 의병들을 무장시키고 훈련시켜 정예의 항일군으로 양성했습니다.
1910년 7월, 최재형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던 『대동공보』가 재정난으로 폐간되자 이를 인수하여 재간하였습니다. 그는 사장으로 추대되어, 격렬한 항일 논문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기사를 게재하여 시베리아, 미국, 멕시코 등 해외와 국내에 배부하였습니다. 이 신문은 일제의 한국 침탈이 다가올수록 논조가 과격해졌으며, 1910년 8월 20일 자에서는 '피를 흘리는 방법 뿐'이라고 절규하였습니다.
최재형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최대 한인 단체인 권업회를 통해 한인 사회의 발전과 독립운동을 지원했습니다. 그는 노우키에프스크 한족민회장으로서 한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한인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습니다. 또한 유류 제조소를 경영하며 교포 인부들을 채용하고, 이들을 유사시에는 항일단체의 의병으로 활용하였습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수립되자, 최재형은 재노령 한인 지도자들과 함께 임시정부의 승인 문제를 논의하였습니다. 그는 초대 재무 총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1919년 11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어 무력 항쟁을 기도하였으나, 1920년 4월 일본군에게 피살됨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1920년 4월 5일, 일본군은 연해주 지역에서 한인 사회를 탄압하는 '4월 참변'을 일으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최재형은 체포되어 4월 7일, 재판 없이 즉결처형되었습니다. 그의 순국 후,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기념 사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최재형의 이러한 활동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며, 한인 사회의 단결과 항일 의지를 고취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의 헌신과 희생은 오늘날까지도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