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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구의 봄비, 꺼지지 않은 불꽃 – 백정기 의사의 길





1933년 3월 17일, 상하이 홍구(虹口) 일대에는 가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좁은 골목마다 희미하게 수증기가 피어올랐고, 인력거꾼과 행인들, 그리고 군복 차림의 사내들이 엉켜 오갔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이들, 짧은 담배를 태우는 이들, 그러나 그날 거리를 떠도는 공기는 결코 평상시 같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홍구의 육삼정(六三亭)에서는 주중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일본 정객과 참모부원, 중국의 친일 정객, 일본군 장교 등 100여 명을 비밀리에 초대해 호화로운 연회를 열 예정이었습니다.

요릿집 안에서는 이미 붉은 등불이 어슴푸레 타올랐고, 술과 요리의 향이 골목 바깥까지 번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육삼정 인근,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 밑에 네 명의 남자가 숨어 있었습니다.

백정기(白貞基), 정현섭(鄭鉉燮), 원심창(元心昌), 이강훈(李康勳).




모두 짙은 외투를 걸치고, 손에는 날카롭게 연마된 수류탄과 권총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서로 눈빛을 나눈 그 순간, 말은 필요 없었습니다. 조국의 이름으로, 압제의 심장부를 꿰뚫기 위해 목숨을 걸기로 한 결심이 이들 사이를 굳게 묶고 있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백정기는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마에는 두려움도, 주저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이미 거사의 계획은 누군가에 의해 새어나갔고, 일본 제국 경찰은 며칠 전부터 비밀리에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던 것을. 그때였습니다.

‘탕탕탕!’ 허공을 가르는 총성과 함께, 사방에서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들이닥쳤습니다.

"포위됐다!" 정현섭이 외쳤습니다.




흰 헬멧을 쓴 헌병대와 검은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골목을 메웠습니다. 인력거 뒤에 숨었던 밀정들까지 튀어나오며 한꺼번에 덮쳤습니다. 이강훈은 재빨리 몸을 숙이며 권총을 뽑았고, 원심창은 수류탄을 움켜쥐었지만 던질 틈도 없이 헌병들에게 붙들렸습니다. 백정기 역시 죽을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중무장한 경찰 병력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혼전 와중에 정현섭은 가까스로 빠져나갔으나, 끝내 체포된 세 사람—백정기, 원심창, 이강훈은 피투성이가 된 채 끌려갔습니다. 거리는 곧 비 냄새와 피 냄새가 뒤섞인 침묵에 잠겼고, 육삼정에서는 예정대로 연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리요시 아키라는 무사히 돌아갔습니다.




이후 체포된 세 사람은 일본 나가사키로 이송되었습니다.

형사재판은 냉혹했습니다. 변호의 기회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은 가운데, 백정기와 원심창은 각각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이강훈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옥중에서도 백정기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인간적인 대우와 고문, 영양실조는 그의 육체를 서서히 갉아 먹었습니다. 결국 1934년 6월 5일, 그는 차디찬 감방 안에서 39세의 나이로 조국의 품에 안기듯 순국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비밀리에 처리되었고, 이름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반면, 원심창과 이강훈은 광복 후 긴 옥고를 치른 끝에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슴에는 끝내 터뜨리지 못한 수류탄의 무게와 조국을 향한 빚진 마음이 영원히 남았습니다.




1933년 3월 17일, 상하이 홍구의 좁은 골목을 울렸던 짧은 총성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백정기와 동지들의 결단은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되어 한 시대를 밝혔습니다. 그들은 실패한 의사가 아니라, 먼 훗날을 향해 불을 붙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백정기(白貞基, 1896년 1월 19일 ~ 1934년 6월 5일) 의사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이봉창, 윤봉길 의사와 함께 '3 의사'로 불리며 효창공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백정기.jpg 백정기 의사



백정기는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신운리에서 아버지 백남일과 어머니 윤옥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총명하고 활달한 성품으로 주위의 촉망을 받았으며, 14세 전후에는 사서삼경에 통달할 정도로 영특했습니다. 1910년, 한일합병 직후에는 정읍의 영주정사에서 한문을 공부하며, 당시 호남의 명문가 자제들과 함께 학문을 닦았습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백정기는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의 홍범도 장군 부대와 연락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후 일본에 밀입국하여 일왕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동경 대지진으로 인해 계획을 중단하고 북경으로 돌아갔습니다. 북경에서는 이회영, 신채호 등과 함께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여 기관지 '정의공보'를 발간하며 활동하였습니다.




1924년 상하이로 이동한 그는 영국인 철공장에서 일하며 폭탄 제조 기술을 익히고 노동운동 단체를 조직·지도하였습니다. 1925년에는 중국인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상하이 총파업을 지휘하였으며, 1927년에는 푸젠성에서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농촌의 자치자위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20년대 후반, 백정기는 상하이로 활동 거점을 옮겼습니다. 그는 이강훈, 원심창 등과 함께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했습니다. 흑색공포단은 아나키즘을 이념으로 삼고 일본 제국주의자, 친일파, 밀정 등을 처단하는 직접 행동을 준비한 무장 조직이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 군경 고위층이 참석한 천장절(천황 생일) 행사장에 폭탄을 투척해 주요 인사들을 처단한 사건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습니다. 사실 이 역사적 거사에는 백정기 역시 동시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백정기는 같은 날 오전 10시에, 윤봉길은 오전 11시에 각각 폭탄을 투척할 계획이었습니다.




백정기는 중국인 동지인 왕야차오로부터 권총은 제공받았지만, 행사장 입장에 필수였던 초대권(입장권)을 확보하지 못하는 바람에 현장 진입 자체가 좌절되었습니다. 결국 백정기는 훙커우 공원 근처까지 갔으나 입장하지 못해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만약 이때 입장권이 제대로 전달되었다면, 윤봉길과 백정기 두 사람에 의해 훙커우 공원은 두 차례 연속된 공격을 당했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백정기 개인에게는 실패였지만, 윤봉길 의사의 성공으로 독립운동의 세계적 인지도를 높이는 데 일조했습니다. 이 일은 백정기의 결연한 독립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투쟁 과정이 얼마나 많은 우연과 변수에 영향을 받았는지를 상징하는 에피소드로 남았습니다.




1933년 3월 17일, 백정기는 상하이 홍구의 요릿집 육삼정에서 열리는 일본 고위 인사들의 연회를 습격하기 위해 이강훈, 원심창 등과 함께 거사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어 일본 경찰의 기습을 받아 체포되었고, 이후 일본 나가사키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복역 중이던 1934년 6월 5일, 백정기는 일본 구마모토현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건강 악화로 인해 3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광복 후, 백정기 의사의 유해는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유해와 함께 일본에서 봉환되어 1946년 7월 6일 한국 최초의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습니다. 이들은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백정기 의사의 묘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와 함께 '3 의사 묘'로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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