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히 가라
무심히 가라
우리 동네 옆에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었다. 어릴 적엔 크게 보였지만 사실은 작은 못이었다. 나는 저수지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을 즐겼다. 특히 친구들과 싸우고 나서나 야단맞고 나면 못 둑에 혼자 앉아서 멀리 읍내를 바라보거나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런데 못으로 가는 데는 방해물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날씨가 좋으면 소를 못 둑에 내다 놓으며 매지도 않고 주인이 지키지도 않았다. 커다란 소가 어슬렁거리는 못 둑을 어린아이가 혼자서 지나가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 길을 자주 오가야 했다. 할아버지 산소에 갈 때나 못 안에 있는 밭으로 갈 때도 그 길을 지나야 했다. 어른들과 같이 가면 문제가 없지만 나 혼자 가게 되면, 앉아서 반쯤 감긴 눈으로 게으름을 부리며 되새김질을 하던 소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나를 향해서 그 큰 눈을 부릅뜨고 침을 흘리며 다가왔다.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정말 무서웠다. 그래서 엄마한테 여러 번 하소연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그냥 소를 의식하지 말고 무심히 내 갈 길만 가라고 했다. 그래서 그냥 내 길을 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해보았다.
소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더 조심조심 살금살금 지나가도 소는 어느새 벌떡 일어나서 나를 향해서 달려들어 혼비백산해서 달아났다. 한 번은 소를 무시하기 위해서 눈을 감고 달리다 언덕 아래로 구를뻔했다. 그것도 실패하자 고개를 소가 있는 반대편으로 완전히 돌려서 소는 보지도 않고 뛰다시피 지나갔다. 뒤돌아보니 소가 그 자리에서 뻔히 나를 쳐다보고 서 있었다. 소가 왔다 갔다 하며 서성거리는 날은 더욱 겁을 먹었다. 소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언덕 아래로 몸을 낮추어서 몰래몰래 비탈진 경사길을 위험하게 지나가기도 했다. 온갖 수를 다 써보아도 소가 있는 못 둑은 언제나 나를 겁먹게 했다. 어린 시절 매여있는 소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고삐가 풀린 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내가 소의 심리를 좀 더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심리학을 배우면서부터였다. 소가 어린아이를 무시한다기보다는 내가 가지는 소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난 나의 행동이 도리어 소를 자극해서 공격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미 그때는 고향을 떠나서 내가 소와 마주칠 일도 없어진 터라 별 도움이 되질 않았다. 그래도 소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되었고, 내 속에 남아있던 두려움 중 하나를 털어버린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가 남아있다. 그것은 엄마가 나에게 일러준 ‘다른 것들은 무시하고 무심히 네 갈 길을 가라’는 말이었다. 내 갈 길만 무심히 가라는 말이 얼마나 거창한 가르침이었는지 그때는 미처 몰랐다. 내 갈 길만 가기도 힘들고 무심하게 살아가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지금 아직도 무수히 많은 것들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심이 내 길을 막고 있다.
단순하고 당연한 것 같은 엄마의 한 마디, 무심히 가라! 엄마는 마치 도인처럼 어린 나에게 평생의 화두를 툭 던져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