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가다
순자 언니네는 우리 집과 담을 마주하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 특히 양식이 부족한 시절, 우리 집에서 뭘 먹는지 알고 있어 엄마는 항상 조심했고 나누어 먹으며 보살폈다. 우리 집 굴뚝이 낮게 만들어진 이유도 그래서 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잣집 옆집 사람은 부지불식 간에 불만이 많고 스스로 서러움을 타게 마련이었다.
순자 아버지는 평소에는 조용하고 공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막걸리 한 잔 걸치면 우리 집을 향해 소리쳤다. ‘나도 마산에서는 한가락 한 사람이었다, 내가 마산 가다였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몰라 엄마한테 물었다. 왜 저 아저씨는 술만 드시면 마산을 가느냐고. 그리고 마산에 가면 조용히 갔다 올 것이지 왜 우리에게 소리치면서 유세냐고. 숨을 죽이고 듣고만 있던 가족들이 내 말에 폭소를 터트렸다. 엄마는 웃으며 마산에서 이사 와서 그런다고 했다. 어린 내가 듣기에도 아재는 뭔가 우리에게 불만이 참 많은 것 같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그 말을 이해하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들이 제 설움을 탄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중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다 여윈 말이 삐꿈 탄다는 문장을 접하고서야 비로소 옆집 아저씨가 왜 술기운을 빌려 우리 집을 향해 소리치는지 알게 되었고,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마산의 가다였다는 과거의 전적을 들먹이는지도 알게 되었다.
지금도 생각나면 정말 미안한 일이 하나 생겨버렸다. 설날이 가까이 오면 우리 집에서는 떡국을 산더미같이 만들었다. 대가족에 할아버지 뵈러 오는 손님까지 생각해서 넉넉히 준비했다. 그 시절에는 가래떡을 뽑아다가 하루 정도 피듯 피듯 말린 다음에 집에서 썰었다. 그런데 워낙 양이 많다 보니 온 동네 아주머니들이 칼과 도마를 들고 저녁에 우리 집에 모였다. 한참 떡을 썰다가, 입담 좋은 고모가 장화홍련전이나 심청전을 이야기하면 한숨과 눈물을 섞어가며 썰었다.
그러면 엄마 따라 마실 온 아이들은 이불속에서 떡도 주워 먹고 이야기도 들으며 같이 자기도 했다. 그런데 심청전 이야기를 듣다 내가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울다가 인당수에 뛰어드는 장면에서는 참지 못하고 목을 놓고 울어버렸다. 그러자 순자 엄마가 언니를 야단치며 왜 애를 꼬집었느냐고 나무랐다. 나는 울먹이며 그게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순자 엄마는 언니가 때려서 내가 운다고 여겼다. 나는 이야기가 슬퍼서 울다가 미안해서 더 울고 순자 언니는 억울해서 울고...
그때 나는 왜 순자 엄마가 딸을 탓하며 날 울렸다고 야단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순자 언니는 나에게 잘해주었고 항상 동생같이 돌봐주었다. 그런데도 아지매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인간 심리를 알게 되었고 더욱이 가난한 사람들의 심리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들이 겪었을 설움과 눈물은 어린 내가 상상조차 못 했던 것이었다. 가난은 단지 돈과 먹을 것이 부족한 것 이상의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내가 마치 죄를 지은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이런 점들을 이미 알고 있던 엄마는 특히 순자네를 잘 챙겼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 서러움과 자존심의 손상까지 모두 걷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학교에서도 그랬다. 분명 내 잘못으로 어항을 깼는데도 선생님은 공부 못하고 가난한 다른 아이를 야단쳤고 친구들도 모두 내 편을 들어주어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일이 벌어져 버렸다. 그날 이후 난 그 친구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게 되었고 지금도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지금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조차 모르고 내 돈으로 내가 사는 것을 당당하게 여기는 것을 넘어 과시하며 살아간다. 그렇다, 정당하게 세금 내며 번 돈이기에 떳떳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당당하지만은 않은 요소들이 감추어져 있는 경우도 흔히 보게 된다. 그래서 함께 사는 세상이기에 나로 인해서 혹시 마음의 상처와 피해를 입을지도 모를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면 어떨까? 이렇게 서로를 존중하고 의식하는 것이 나와 이웃 모두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와 도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