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든다는 것

by 최선화

나이가 든다는 것

언니가 조금 이상해서 치매검사를 했다. 다행히 결과가 나쁘지 않다고 한다. 안도감이 생기면서도 앞으로 다가올 일들이 머리를 스치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사실 나와 언니는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었고 언니는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 가족들과도 소외되어 힘겨운 삶을 살아왔다. 끝까지 언니를 걱정하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남긴 부탁은 언니가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언니는 어머니가 죽음 앞에서도 마음을 놓지 못한 어머니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나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한 번씩 만났고 필요한 일들을 도와주었지만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언니를 보면 마음속 온갖 억눌린 기억들과 무거운 감정들이 재생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겨 우리 형제들이 나서서 돕고 있지만 가장 가까이 있다 보니 일차적인 도움을 주게 되었다.

언니는 개성이 강한 우리 가족 중에서도 성격이 좀 유별나고 가족 간의 상호작용도 드물어서 어쩌다 만나도 말이 잘 통하지 않고 피해의식이 먼저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우리가 언니에게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모두가 참고 인내하며 잘 지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번 일로 자주 만나다 보니 언니는 이미 다 늙은 초라한 노인에 불과했고 지난 일들은 이미 기억조차 가물거렸다.

우리 모두를 짓누르던 무거움이 한순간에 다 눈 녹듯 사라지며 그냥 한 사람으로 보였다. 어느 누구나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사연들이 있게 마련이고 인생의 질곡을 겪으며 살아낸다. 언니도 그런 보통 사람이었다. 그래, 언니는 그냥 나의 언니일 뿐이다. 지난 과거야 어떻든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별것도 아닌 허상에 사로잡혀 서로를 직시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우리가 범한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내 마음속 여러 감정과 짐들이 눈 녹듯 사라지며 언니를 그냥 내 언니로 보게 되고 연약한 한 노인으로 보게 되었다. 항상 부담스러운 면이 있는 존재였지만 이제는 그 부담감마저 사라지고 연민과 측은지심만이 피어오르고 있다. 나도 곧 저렇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도...

그러니 아무런 판단도 비판도 억울한 감정도 털어버리고 그냥 서로를 너그럽게 대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다음에 내가 누군가로부터 받고자 하는 대접을 나는 지금 언니에게 해주고 있다. 이렇게 별 것 아닌 기억들과 삶의 부산물에 불과한 감정의 찌꺼기들로 낭비한 우리의 시간이 안타깝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지금부터라도 남은 시간이나마 후회 없이 잘 보내야겠다. 서로 위로하고 다독이며 어려운 길에 들어선 형제와 좋은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위로하며 손잡아 주어야겠다.

어린아이가 아프면 가족이 뭉쳐지고 노인이 아프면 가족이 갈라진다고 하지만 그것도 생각하기 나름이다. 이렇게 노인 인구가 더 많은 사회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자비심과 연민의 정으로 서로 돕고 감싸준다면 노인을 간병하고 부양하는 일이 부담감만이 아니라 배움과 성숙의 기회가 될 것이다.

진정한 어른이 없는 이 시대에 노인이 대접받지 못하고 무시되는 이런 시대에 우리들 간에라도 서로를 존중하고 인간적인 예를 다함으로써 젊은이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형제가 어떻게 지내야 하고 서로를 어떻게 위로하고 감싸주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될 것이다. 영화 마빈의 방에서처럼 일생을 바쳐 가족을 돌본 딸이 자신의 죽음 앞에서 가족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고 낭비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가족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에 감사했다. 나도 그렇고 싶다. 내가 언제 가족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한 적이 있는가? 이제는 내가 돌려줄 기회가 된 것이다.

얼마일지 모르지만 길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나마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서로를 더 잘 알아갈 수 있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 다행스럽다. 사람이 사람을 부담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축복이 되고 서로를 채워주는 존재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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