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잔치
지금껏 살아오면서 참 많은 빚을 지고 살아왔다. 물질적인 빚보다는 마음의 빚과 특히 시간의 빚을 제일 많이 진 것 같다.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내 일만 했지 주변을 돌아보고 돌보지 못했다. 특히 성장기에는 내 공부만 했고 사회생활은 학교에 있다 보니 퇴근을 해도 일의 끝이 아니며 항상 머릿속은 바빴고 쫓기듯 살았다.
친구를 위해서 같이 놀아주지도 못했고 먼 길에 동행하지도 않았다. 가족에게도 언제나 양보를 받아오기만 했다. 더욱이 막내이기에 집안일은 나이 많은 형제들이 다 알아서 처리했고 나는 겨우 참석하는 정도였다. 농담처럼 퇴직하면 다 갚아주겠다고 했으니 이제는 때가 된 것 같다.
나를 위해서나 내 중심으로 가 아니라 진정으로 가족과 이웃이나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내 시간을 할애하고 그들과 함께하며 나누어야 할 때가 되었다. 특히 가족들이 이제는 모두 나이들이 있다 보니 내가 나서서 도와야 할 일들이 생겨나고 있다.
막내가 나서서 나이 든 형제와 가족을 돌볼 때가 된 것이다. 그들이 나의 성장을 도왔듯이 나도 그들의 마무리를 도와나가며 나 자신의 마무리도 준비해 나갈 것이다. 그럼으로써 뒤에 남은 가족들에게도 어른 다움을 보여줄 것이다.
내가 가진 얼마 안 되는 지식과 기술이나마 모두를 위해서 사용하고 돕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봉사할 것이고 기회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어느 순간 하나 봉사하고 진정으로 사는 듯이 살 기회가 아닌 것이 없다.
지나치는 이웃에게 다정한 인사를 나누는 것, 친절한 한 마디 모두가 봉사고 사랑의 표현이다. 거창하고 원대한 무엇을 찾기보다 내 주변부터 살펴 돌보고 내가 할 일들을 찾아가는 것이 나이 먹은 사람의 어른다운 행동일 것이다.
얼마 전 길을 가다 업소용 짐수레가 경사로에 위태롭게 방치되어 있었다. 언제든지 미끄러질 수 있고 그래서 사람이나 차가 다칠 수 있을 것 같아서 걱정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치울 공간이나 묶을 수 있는 끈이 없어 한참을 지켜보다 그냥 돌아서게 되었다. 그곳에 방치한 사람을 속으로 나무라고 원망하면서.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보니 한 노인이 무거운 짐수레를 경사로에서 힘들게 끌고 와서 끈으로 나무에다 묶고 있었다. 그래, 저게 바로 어른이 할 일이다. 위험이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 힘들여 끈을 구해다 묶어서 아무도 다치지 않게 아무도 지시하지 않아도 스스로 조치한 것이다. 그분이 어른다운 어른으로 그의 얼굴이 참 평온해 보였다.
지금도 학교 뒷산 등산로가 생각나면 한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가 바로 사월 초파일쯤이었다. 아침 일찍 뒷산을 오르다 보니 한 노인이 경사로에 주저앉아 길을 다듬고 있었다. 이상해서 인사를 하며 말을 걸었다.
그분은 지난밤, 초파일이 다가오는데 부처님을 기쁘게 할 일이 뭔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고 한다. 형편에 맞지 않는 많은 시주보다는 많은 사람이 다니는 경사로가 위험하니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고치는 것이 부처님이 더 좋아하실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새벽부터 고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날 아침 생불을 만났다.
누가 시키지 않고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먼저 책임감을 수용하며 내 할 일을 하는 것, 모두에게 필요한 일을 조용히 처리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숙이고 어른 다움이라 생각되었다. 그렇게 치면 우리가 할 일이 많고 이 사회가 우리의 손길을 언제 어디서나 기다리고 있다.
어디 눈에 보이는 일뿐이겠는가? 서로를 축복하고 기도하는 것 못지않게 내 삶의 품위와 가치를 나 스스로 지키며 사는 것이 먼저인 것 같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이런 보이지 않는 돌봄과 배려의 공덕을 입어왔는가? 운전이 서툴렀던 시절 많은 양보와 배려 덕분에 큰 사고 없이 지나왔고 새벽에 일어나 청소해 준 분들 덕분에 깨끗한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몇 푼의 돈으로 그들의 수고와 배려를 다 보상했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나에게 생명을 허락한 근원에서 본다면 내가 어리석음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삶을 헛되게 하는 순간들이 많았음에도 이렇게 생명을 보존해 주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 그러기에 남은 시간이나마 헛되지 않게 사랑과 진리와 생명을 펼쳐나가는 일을 조용히 실천해나갈 것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근원에서 계획한 일을 이 땅의 대리인이 되어 그의 눈이 되고 귀가 되어 충실히 이루어나갈 것이다. 그리하여 창조주가 나를 이 땅에 보낸 뜻이 헛되지 않도록. 아름다운 지구별에 공해와 쓰레기만 만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과정에 보탬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