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그리고

겨울 나그네

by 최선화


금요일 오후의 주말 병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다 떠나버린 텅 빈 호스텔에 남아서 외국인들끼리 쇼핑과 빨래, 청소 등을 하며 빈둥거리는 시간은 비참한 느낌마저 들었다. 주말 잘 보내라는 말을 듣는 것조차 거북했다, 잘 보낼 방법이 없었기에. 연말 휴가가 곧 시작될 텐데, 무엇을 할지가 고민이었다.

이참에 유럽여행을 하자, 크리스마스를 호스텔에서 혼자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유럽 4개국 버스여행을 신청했다. 그래 그냥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세상 구경을 하기 위해서 움직여야지,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기회와 자유가 주어졌는데.... 그냥 있을 수는 없지.

교과서에서 흑백사진 몇 장만으로 싱겁게 배운 것들을 직접 느껴보고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나도 한 인간으로 그리고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유와 여유를 누리고 싶었다. 한국을 벗어남으로써 주어지는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무한대의 자유를 구가하며 집행유예와도 같은 짧은 기회와 여유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버스에는 노부부들이 대부분이었다. 동양인은 나 말고는 일본에서 유학 온 여학생이 두 명 더 있었다. 어두침침하고 눅눅하며 칙칙한 영국의 겨울을 벗어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다. 도버의 하얀 절벽을 향해 힘껏 미련 없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는 두려움보다는 기대와 희망으로 부풀었다. 마치 영국으로 향하던 그때처럼...

도버해협은 그날따라 거칠었다. 머리가 조금 아픈가 싶더니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선상 카페는 철시를 서두르고 모두가 움츠리고 빨리 모든 것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이 적막감 속에 지나갔다.

조금 진정된 듯해서 둘러보니 보르도였다. 이미 프랑스에 도착한 것이다. 화창한 날씨와 프랑스 특유의 경쾌함과 멋스러움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했다. 맛없기로 이름난 영국 요리에서 벗어나서 싱싱한 야채와 생선, 과일 그리고 샹송과 와인이 있는 식탁은 벌써 나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파리에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약간 풀어진 듯한 파리 여인들의 눈빛이며, 풍만한 가슴을 드러낸 아름다운 여신상과 조각들, 넘쳐나는 낭만적인 분위기에 젖어, 그곳에서 사랑에 빠져버리지 못한다면 병원에 한번 가보라고 충고하고 싶다.

사람을 홀리는 듯한, 유혹적인 분위기 속에서는 잠시 모든 것을 던져버리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랭루주에서의 캉캉춤과 쇼는 화가 로트렉을 생각나게 했고 그의 그림에 나오는 천박한 듯한 여자들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짐작이 갔다. 샹젤리제 거리의 화려함과 몽마르트르 언덕의 유혹들, 이곳에서 산다면 더 고독해지고 더 비참해질 것 같았다.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그 많은 유혹 속에서 차가운 현실을 직면해야만 하는 것은 어쩌면 고문일지도 모른다. 노트르담의 꼽추와 개선문에서의 사랑, 보헤미안들의 애환과 열정이 우리의 가슴속에 잠자고 있는 뇌관으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그래서 모두 떨떠름한 포도주와 쿰쿰한 프랑스 치즈로 삭이고 삼켜버리나 보다. 파리에서의 유혹과 환상은 처음엔 달콤하지만 쌉싸름하고 아린 초콜릿처럼 인생과 사랑에 대한 기억들이 그들의 입맛을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렇게 삼켜버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만드는, 취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분위기들, 그래서 몽롱함과 시금털털한 현실 속에서 삶에 대한 몽상과 예술적 환상이 뒤섞이어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나 보다. 아예 도망치든지 아니면 영원히 머물든지 둘 중 하나만을 택해야만 하는 현실 선택 앞에서 나는 서둘러서 짐을 챙겼다.

정말 나를 못 견디게 만든 것은 어딜 가나 넘치는 향수 냄새로, 그것은 향기를 넘어 지독한 악취이자 공해로 골이 아프고 속이 울렁거려 참을 수 없었다. 특히 식사시간에 나의 모든 미각을 앗아가는 그놈의 냄새 때문에 거의 신경질적인 반응이 일었다. 초겨울의 싸하고 청하며 정신 바싹 들게 하는 맑은 공기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알프스의 무공해 청정 공기와 냉수를 마음껏 들이켜며 평상심을 회복하고 싶었다.

불과 몇 시간밖에 달리지 않았는데 어쩜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창밖에 보이는 풍경이 독일적으로 느껴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독일의 숲들 그리고 경직성... 하이델베르크 궁전과 황태자의 첫사랑을 기억하며 쓴 맥주와 짠 소시지를 먹었다. 음식이 이리도 그 나라의 문화와 국민성을 나타낼 줄이야... 나를 흥분시켰던 프랑스 요리의 향기와 예술적이고 아름다운 카페들은 다 사라지고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독일의 견고함과 투박함이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중세 기사들의 갑옷을 쓰고 있는 듯한 딱딱함과 무거움에 비하면 노골 노골한 프랑스인들이 도리어 이상스러웠다. 머리를 맞대고 사는 두 나라가 이렇게 다르다니, 그 다름으로 인해 분쟁이 아니라 포용력이 생겼다면, 인류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알퐁스 도테의 ‘마지막 수업’에서의 안타까움이 생각났다. 눈이 산더미처럼 쌓인 공원 바닥에 그려진 체스를 하느라 통나무 포석을 옮기고 있는 노인들... 정말 독일스러웠다.

내 여행 목적지는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아름다운 산장들이었다. 비엔나, 잘츠부르크, 인스브루크 같은 곳이 내가 원하던 곳이었다. 아기자기한 거리의 상점들과 식당들, 그리고 그림 같은 호텔의 예쁜 방, 나에게는 마음에 쏙 드는 곳이었다. 크리스마스는 이런 스키 산장에서 보내는 것이 제격이지. 떠들썩한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가 끝나자 쌍두마차를 타고 눈 덮인 작은 마을과 목장으로 나갔다. 마침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해서 우리는 더욱 신바람이 났다. 짤랑대는 방울 소리를 들으며 눈이 쏟아지는 밤에 노래를 부르다, 탄성을 지르다, 눈밭에서 뒹굴다 지쳐 호텔로 돌아왔다.

언 몸에는 카푸치노가 제격으로 치즈케이크와 함께라서 더욱 좋았다. 데미 컵에 담긴 카푸치노는 내 약한 위장에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피칸파이를 하나 더 먹었는데도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덕분에 밤새도록 창밖을 보며 눈 덮인 크리스마스 밤에 산타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아이처럼 뜬눈으로 지새웠다. 창밖으로 보이는 눈 덮인 알프스는 시리도록 아름다웠고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별들은 영원처럼 아득했다.

저 아득함 그 뒤의 어렴풋한 향수와 그리움 그것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이며 뭐란 말인가? 단순히 멀리 있는 가족과 친구에 대한 그리움인가? 아니면 그 먼 기억 속에 아스라이 가물거리며 남아 있는 인간 본향에 대한 기억이며 그리움인가?

예수라는 한 인간의 탄생에 대해서 온 세계가 이렇게 흥분하는 이유가 뭘까? 그와 나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2000년도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의 탄생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휴일로 쉬고 이렇게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 말고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쉬게 해 준다는 의미에서는 참 고맙게 생각된다. 그가 우리 조상도 아닌데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일처럼 생각되었다. 한 대단한 분의 탄생을 이렇게 평가절하할 수는 없지만 솔직히 나와의 연관성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공자나 부처님처럼 좋은 본이 되어준다는 사실 말고는....

유럽여행은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오던 꿈이 하나 이루어진 기쁨과 그렇게도 소망하던 정신적인 휴식과 쉼이 주어진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국이라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겪어야만 했던 온갖 스트레스와 헝클어진 감정들이 공간적인 분리에 의해 저만치 물러나면서 내 삶에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자연인으로서의 나의 삶을 회복하고 나를 찾아가는 새로운 여정에 대한 기대와 예감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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