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그리고

명의

by 최선화


영국 땅에 도착하면서부터 나에게는 고민거리가 생겼다. 평소에도 대장이 예민한데 석회질이 많은 물은 감당키 어려웠다. 그래서 제일 먼저 병원을 찾은 이유도 장 때문이었다. 약을 먹으면 좀 덜 하다가도 가끔 날 괴롭혔다. 며칠 전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참고 지내다 보니 다리까지 아파지기 시작했다.

그날도 날씨는 흐려 부슬부슬 비조차 내리고, 학교 갔다 와서 병원으로 가니 내가 맨 마지막 손님이었다. 병원 한구석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니 배도 고프고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한참 후에야 하얀 머리의 노인이 피곤한 기색으로 나를 맞이했다. 그는 나이 탓인지 지쳐 보였지만 부드럽고 따뜻하게 맞아 주었고 내가 마지막 환자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눈치였다.

증세를 설명하면서부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다 그만 통곡으로 변해버렸다. 의사는 무척 당황하면서도 나를 달래기 위해서 애를 썼다. 약간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자 그는 남자 친구와 헤어졌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가 막혀 아니라고 했다. 젊은 아가씨가 병원에 오는 것은 대부분이 남자 친구와 문제가 생겼을 때라며 웃었다. 나는 혼자서 유학 온 학생이라고 하자 그는 이해하는 듯한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내 경우에는 향수병 때문이고 외로움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채고서, 언제 집으로 돌아갈 건지 친절히 물어 주었다.

실컷 울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내 속에 그렇게 많은 긴장과 외로움이 누적된 줄은 나도 몰랐다. 울음보가 터지자 봇물 터지듯 쏟아졌고 나도 감당키 어려워 목을 놓고 대성통곡하며 울었다. 생전 처음 있는 일이어서 나 자신도 놀랐다.

내가 왜 통곡했을까? 울고 싶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도 없고 외롭다고 고민한 적도 없는데, 왜 그랬을까? 그것도 피곤에 지친 생면부지의 외국인 의사 앞에서? 나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가 만약 젊은 의사였다면 나는 그렇게 울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미 70을 넘긴 노신사였고 내가 어떤 실수를 하거나 어리광을 부려도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은 따뜻함과 너그러움을 지닌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꽁꽁 묶어 두었던 마음의 빗장을 여는 것은 그냥 되는 일은 아니다. 열어도 괜찮을 안전한 곳에서만 열리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분명 명의였다. 사람의 가슴을 열어 치유가 일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은 탁월한 능력이며, 기술보다는 경험이 녹아난 삶과 존재 자체로 가능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와 부처도 탁월한 치료사였다.

그는 여러 면에서 노련한 의사였다. 젊은 여성이 병원을 찾을 때는 신체적 질병보다는 마음의 병이 원인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남자 친구와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렇다, 얼마나 많은 병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마음을 고치려 하지 않고 몸만 고치려 드니 낫질 않는 것이다. 감기에 걸리는 원인의 많은 부분이 심리적 요소이며 교통사고 원인의 높은 비중이 심리적인 요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의사는 환자의 신체 상태만큼 심리 상태를 고려하게 된다.

어릴 적 머리가 아파 약을 먹으면서 약이 머리로 가지 않고 배에서 다 없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됐다. 혼자서 고민하다 말고 오빠한테 물어보았다. 오빠는 장난기가 동해서 약이 너처럼 청개구리가 아니어서 괜찮다고 했다. 그래도 난 자꾸만 걱정되었다. 몸에게 나는 머리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약이 머리로 가도록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궁리 끝에 약을 이마에 바르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가루약이어서 물에 타서 이마와 머리 쪽에 골고루 발랐다. 그것도 모자라서 빨간약을 보조제로 이마에 발라 표시까지 해주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표시해 준 다음에야 겨우 안심이 되었다. 나를 발견한 오빠는 데굴데굴 구르면서 웃었고 온 집안에 웃음보가 터졌다. 엄마는 약을 먹으면 몸이 다 알아서 스스로 처리한다고 했지만 어린 나로서는 믿음이 가질 않고 영 석연치 않았다.

몸의 어느 부위가 아프다고 하면 그 부분을 치료하는 것은 어릴 적 내 경험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생각이다. 온몸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정교한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한의학에서도 몸을 전체적으로 보며 기운을 돋아주고 기를 원활하게 풀어주면 병은 낫는다고 한다. 게다가 몸의 이상보다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문제가 신체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왜 여성들에게 우울증이 많은가? 현대사회에는 우울증이 왜 늘어만 가는가?

건강이라는 개념에는 전체성을 포함한다. 전체성이란 개인에게는 개인 전체인 신체와 심리, 사회 그리고 영성까지 포함한다. 사회적으로는 모든 구성원을 포함한다. 그래서 마음이 아파도,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겨도,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지 못해도 병이 나며, 이런 유형의 병은 어떤 의미에서는 더 깊어지고 있다. 그래서 지구 전체가 중병을 앓고 있다.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은 바로 이런 인간 존재의 문제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서 사춘기부터 떠나지 않는 허무와 공허함이 나를 더 민감하고 병약한 사람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 나의 이런 고질병에는 어떤 처방이 필요한가? 내 마음의 빗장을 풀고서 나도 모르게 깊숙이 억압되어 있던 감정들을 터트려서 풀어버리게 할 수 있는 노련한 의사를 만난 것처럼 내 존재의 고질병들을 치유해줄 귀인은 언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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