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그리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by 최선화


내가 새해 벽두부터 미클튼으로 가겠다고 하니 크리스마스 휴가를 함께 보낸 웰링튼씨 가족들이 몹시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분들로서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내가 초대받아 가는 곳이 어디인지, 초대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었지만 난 별로 대답할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잘 모르니까. 그냥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며 한국 유학생회에서 만난 그가 와보라고 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가는 거니까. 무조건 가보겠다고 하니 이분들은 나의 무모함에 당혹해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완곡한 표현으로 이것, 저것 염려를 나타냈지만, 나의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역에 바래다주면서 작별 인사를 나누고 손을 흔들어 주던 두 분의 표정이 잊히지 않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아마 우리 부모님이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두 분의 염려와 애정이 내 마음 깊숙이 다가왔다.

기차에 앉자마자 정말 내가 왜 가는지, 무엇을 기대하는지 자문해 보았지만 나 스스로조차 어느 것도 분명치 않았다. 그분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의 안전을 저렇게 염려하시는데, 나 자신도 알 수 없고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냥 막연하게 내가 원하던 환상을 따라서, 아니면 그 무엇에 홀려서 그렇게 모험을 단행한 것이다. 내 앞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도 모르면서... 어떤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과 믿음뿐이었다.

기차가 멀튼 인 마쉬에 도착했다. 내리려고 나왔지만 문을 열 수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문고리나 손잡이가 보이질 않았다. 급히 객실로 뛰어들어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한 여성이 달려 나와 함께 두리번거렸고 이미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여성은 창문을 열고서 밖으로 손을 내밀어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움직이던 기차가 다시 서서 겨우 내릴 수 있었다.

역은 볼품없이 작았다. 역무원도 한 사람뿐이며 시간제 근무를 하는 것 같았고, 우리나라 벽촌의 역도 이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이곳은 하루에 몇 번밖에 기차가 서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을 벽에 붙어 있는 시간표를 보고서야 알았다. 약속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아무도 나오질 않았다.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 벽에 붙어 있는 전화번호부를 뒤지며 콜택시를 부르려던 참이었다.

기다리는 시간은 참 막막하며 서글프고 무섭기도 했다. 사방이 컴컴하고 역무원에게 물어보려고 하니 그는 이미 사라져 버려 역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사방은 인적조차 없이 어둠만이 에워싸고 있는 외딴곳에,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에 혼자 버려진 것이었다.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내 머리는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만약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다행히 전화번호부가 벽에 달려있어 구세주처럼 여겨졌다. 경찰을 부를 것인가? 아니면 콜택시를 불러 근처 호텔로 안내해 달라고 할 것인가? 값싼 비앤비로 갈 것인가? 그 순간 불빛이 다가오며 차 소리가 들렸다.

나를 초대한 그가 나타났다. 언제나 늦게 미안해하지도 않고 사과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없이 차에 올랐다.

캄캄한 밤길을 40분 정도 달려 미클튼 하우스에 도착했다. 영국 중부 특유의 부드럽고 따뜻한 노란색 벽돌로 지어진 단아한 2층짜리 호텔이었다. 친절하고 따뜻하게 맞아 주는 사람들, 모두가 우아해 보이고 처음 보는 나에게 스스럼없이 듬뿍 안아주는 듯이 가깝게 느껴졌다. 잘 정리된 실내와 격조 있는 분위기, 상당한 품위를 갖춘 것 같은 사람들 모두가 마음에 들었다. 기차역에서의 고민은 까맣게 잊고 나도 모르게 동화되어갔다.

이곳이 뭘 하는 곳인지, 내가 왜 이곳으로 초대되었는지, 저들은 왜 저리도 친절하고, 교양 있어 보이며 확신에 차 있는지 모든 것이 궁금했다.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 그에게 물었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마음공부하는 도 닦는 곳이라며,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느껴보라고 했다. 흠! 도를 닦는 곳이라.... 상당히 구미가 당겼다.

“도”가 무엇인가? 유도, 태권도, 다도... 도 속에 파묻혀 살지만 정작 도가 무엇인지 항상 궁금했다. 사는 것이 모두 “도”라고 하는 동양인이 하필이면 서양에 와서 도를 닦는다니 참 희한한 일이었다. 이들이 말하는 도는 무엇인가? 특유의 호기심과 모험심을 자극하는 말이었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자고 나니 개운했다. 그러고 보니 전형적인 영국식으로 잘 꾸며진 방의 분위기가 안정되고 포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낯선 곳이지만 왠지 친근하고 마치 우리 집같이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사춘기 시절 속세에서 벗어나 도를 닦으며 사는 삶을 꿈꾸어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산속이나 수도원에서가 아니라 속세에서 도를 닦는다는 사실에 한층 더 구미가 당기며 회가 동하고 온몸에 에너지가 흘렀다.

그래도 오늘이 정월 초하루인데... 일단 아침을 먹기 위해 내려오니 식당에 사람들이 꽤 많았다. 모여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친한 사람들 같았고 나도 어느새 그들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와 가벼운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마치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처럼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냄새를 맡으며 단서를 찾아다녔다. 마치 거대한 우주적 비밀을 찾아 나선 탐정이나 과학자처럼. 허기야, 나에게는 이보다 더 큰 미션은 없다. 그놈의 모호하고 애매하기 짝이 없는 ‘도’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참에 꼭 밝혀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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