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다음날 점심시간에 그를 한국음식점에서 다시 만났다. 오랜만에 한식을 먹고, 한국말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흡족했다. 한국적인 것, 익숙한 것에 허기진 때여서... 그가 누구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누구 건 간에 한국말로 얘기하고, 한식을 같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이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단단한 체구로 슈베르트와 같은 동그란 무테안경을 낀 영리해 보이는 남자였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정식으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일찍 한국을 떠나 북미에 성장했고, 지금은 세계 최고의 장학금인 로드 스칼라십으로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있는 철학 도라는 말에 호기심이 동했다. 그는 한국인이면서도 내가 고민하고 멀미를 느꼈던 한국의 정치적 상황으로부터 빗겨 나 자유세계에서 성장한 사람이었다.
난 가끔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었다.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 너무 소모적이라고 느껴질 때면, 만약 내가 한국이 아닌 미국이나 다른 곳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지금 난 어떤 고민을 하고, 무엇에 몰두해 있을까? 좀 더 인간 존재의 본질적 문제에 몰입해 있지 않을까? 내 가슴에는 사춘기 때부터 제기된 많은 존재론적이고 의미론적인 질문들이 숙제로 남아 있지만,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휘말려 그 모두를 잠시 묻어 두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것에 관심이 있으며 그의 삶의 주제는 무엇인가가 궁금해지며 나의 호기심을 발동시켰다.
그의 이야기는 흥미로웠고 내가 한국에서 놓쳐버리고 있는 것들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가 지금 옥스퍼드로 올 수 있었던 것도, 지구촌 최고의 엘리트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것도 사회적 여건이 허락해 준 또 다른 혜택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대학 4년 내내 수업에서 앞 장을 넘어가질 못했고 체류탄 가스로 눈물을 흘려야 했던 한국의 뒤숭숭한 상황과는 달리 자유와 안정 속에서 자신들이 원하던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직접 참가했건 안 했건 간에 우리 모두는 그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대부분의 에너지와 관심이 그쪽으로 쏠려 있는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볼모 상태였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추구하고 열정을 쏟았던 일들에 대해서 얘기했고 나는 부러움과 시기심 어린 마음으로 경청했다. 철학을 공부한 사람의 폭넓은 사고와 자유 세계가 안겨준 기회와 경험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꿈이었고 환상이었다.
나는 왜 복지를 선택했는가? 한국의 가난과 그 신음 소리들이 주변에 널려있어 외면할 수 없었고 뿌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나의 상황에 비한다면 그는 자유와 풍요로움 속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었으며 당연한 권리로 여겼을 것이다. 내가 경험할 수 없었기에 꿈꾸어 오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었다. 그가 부럽다 못해 마치 그동안 잃어버린 또 다른 나의 모습이 펼쳐지는 듯하며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진 것 같은 설렘이 일기 시작했다.
그의 당당하고 확신에 찬 모습을 보며 갑자기 나의 이상과 꿈이 현실로 나타난 것 같은 환상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마치 호리병에서 연기를 뿜으며 나를 위해서 나타난 지니와 같은 환영을 보는 듯한 몽롱함 속에서, 어떤 가능성이 감지되며 저항할 수 없는 끌림을 느낀 것은, 오랜만에 마신 동동주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나의 호기심과 관심을 눈치채고 다음 주말에 옥스퍼드로 초대했다.
참 희한한 인연이었다. 우리는 서로 만나지 못했다면 둘 다 미팅 장소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둘 다 서로를 만남으로써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나는 정보를 가졌지만 풀어내질 못했고, 그는 정보는 부족했지만 풀어낼 능력이 있었다.
옥스퍼드로 가는 기차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더욱이 내가 그 꿈을 꾸고 나서 만난 사람이 그였다. 그의 출현은 내 꿈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날 한국음식점에서 느꼈던 신기루 같은 환상들은 무엇인가? 단지 상상이며 취기에 불과한 것이었나? 나는 지금 환상을 좇고 있는가? 아니면 실체를 찾아서 따라가고 있는가? 무엇에 홀린 것인지 아니면 백일몽 속에서 헤매고 있는지, 스스로도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어떤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따라가고 있었다.
그는 옥스퍼드를 구경시켜주었다. 도시는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고 친근감이 일었다. 그는 다시 다음 주 대학에서 열리는 강연회에 초대했다.
“강사는 죠지 에머리라는 북미에서 유명한 분으로, 60년대 히피 운동의 핵심인물이었고 젊은이들의 우상이었어요. 지금도 젊은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누리는 사람으로 그의 삶에 대한 인식과 안목이 독특하고 새로워서 좋아할 것 같아요.”
영국으로 오면서 결심한 것 중 하나는 한국이라는 상황 속에서 놓쳐버리고 밀쳐 두었던 것들을 경험해 보고, 하나하나 챙겨보는 여유를 갖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학교 공부는 별로 부담이 없어 나는 이참에 개인적인 욕구들을 충족시키고 가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었다.
이런 사치는 한국에서는 내적, 외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에게 이런 여유와 호사는 20대의 젊은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며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책임지려는 사람의 진정한 권리이자 책임으로 생각되었다.
“그래, 이참에 한국에서 내가 그렇게 안타까워하고 아쉬워하던 것들을 찾아 나서는 모험을 해보자. 비록 나의 모험과 항해가 난파선이 되고 상처로 얼룩진다고 해도 난 후회하지 않으리라. 그것은 나의 선택이었고 내가 그렇게도 원했던 일이었으며, 한국이라는 상황 속에 갇혀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던 기회들이기에.” 나의 모험에 행운이 함께 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미 첫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