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찾기
런던에서 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주소가 다 붙어 있으니까. 그런데도 대학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건물들이 섞여서 애를 먹고 있었다.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며 헤매고 있는데, 불쑥 한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 당시(40년 전) 런던에서 한국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어서 반가움과 함께 안도감이 일었다. 사실 정확한 주소 없이 모임 장소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게 느껴져 여차하면 돌아갈 참이었다. 그도 장소를 찾지 못해 헤매다, 나를 발견한 것이다. 둘은 암호를 풀어가듯 서로의 정보를 합쳐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대학 강의실에 몇 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서로 소개하는 인사도 하고 한국유학생회의 보고도 하고 그리고는 모임이 파티로 변하여 밤늦도록 이어졌다. 어느 순간부터 또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말 신물이 났다. 난 그런 상황이 지긋지긋해서 도망쳐 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또 그놈의 정치 이야기를 하다니 전혀 듣고 싶지 않았다, 잊고 싶고 지워버리고 싶었다. 딴전을 피우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가장 최근에 왔으니 제일 잘 알지 않아요? 얘기 좀 해보세요.”
“내가 이곳으로 온 것은 그 상황이 신물 나서요. 난 여기에서나마 좀 잊어버리고 싶고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나의 말에는 단호함과 감정이 묻어 있었다. 예기치 않은 날카로운 반응에 당황한 듯, 분위기가 서먹해지며 어색함이 감돌았다. 다시 잔이 돌고 여기저기에서 농담과 웃음이 오가며 긴장감이 사라지자, 미안한 마음과 함께 나의 과민 반응에 스스로 놀랐다. 아마 내가 과민해진 것은 광주사태 때 느꼈던 절망과 그 피비린내 나는 야만성에 대한 분노가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한국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이곳 생활에 적응하느라 난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내가 떠나온 상황과 이곳으로 도망쳐 온 이유를. 대학 4년 내내 지속된 데모와 10. 26, 12.12 그리고 광주 민주화운동, 그 모두는 나를 절망하게 했다.
내가 유학의 길을 택한 이유는 이 모두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고 새로운 질서와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서는 더 이상 길이 보이질 않았다. 그래, 한국에서 무력감과 절망감에 빠져 있느니 차라리 벗어나자. 그래서 진정한 새길을 찾아보자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한 큰 명분이었다. 더욱이 복지를 공부하는 나에게 영국의 사회정책과 민주주의는 작은 희망처럼 보였다.
우리 시대의 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혁명을 꿈꾸어 보고 사회운동에 헌신하는 삶을 적어도 한 번쯤은 깊이 고민해 보았을 것이다. 특히 우리가 젊었던 시절과 같이 독재정권이 판을 치고 데모가 끊이질 않던 시기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라면.
그러나 나에게는 사회운동과 혁명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우선은 남들만큼 강인한 체력을 가지지 못해서 운동하는 집단과 사람들에게 도리어 짐이 될 것이 뻔했고, 또 다른 이유는 우리 집안 때문이었다.
우리 외가는 독립투사 ‘김원봉’의 집안으로 나라의 독립에는 큰 기여를 한 걸출한 인물이었지만 그 뒤에 남겨진 가족이 겪어야 했던 수모와 고초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하기조차 힘들었다. 더구나 어머니의 외삼촌인 독립투사 ‘황상규’로 인해 삼족을 멸하는 고난을 겪은 집안이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어머니는 혁명가의 집안이 가야 하는 험한 가시밭길과 가족이 당한 울분을 눈물로 하소연하곤 했다. 어린 나도 어머니가 우리 할아버지가 알게 모르게 사람들을 시켜 쌀가마니를 외가 쪽으로 져 나르는 것을 목격했다. 밀양 장날이면 몇몇 분들을 모셔다 막걸리 한 사발과 뜨끈한 국밥을 대접해 드리는 일이 많았다. 그러면서 어린 나에게조차 민망했던지 저분들은 나라를 위해서 가족을 희생당한 친척들이어서 보살펴야 한다고 말끝을 흐리곤 했다. 비록 어머니가 해방 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로 지정되신 당신의 외삼촌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지만 그분은 그래도 남쪽에 남았으니 망정이지, 사촌오빠인 김원봉은 북으로 가서 밀양에 남은 가족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수모와 고통을 당한 아픔과 슬픔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가족사적인 경험으로 인해 나는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에는 아예 발을 디뎌 넣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진정한 운동은 모두를 위한 운동이어야지 가족을 희생시키고 주변 모두에게 그렇게 큰 아픔과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운동은 무엇을, 누구를 위한 운동인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에 의한 희생이었지만 한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이념과 체제와 가치의 대립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 모두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는 것은 나에게는 큰 모순으로 여겨졌다.
모든 운동의 본질이 무엇인가? 다 같이 잘 살기 위한 것 아닌가? 그런데 가족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사실은 모순 아닌가? 그래서 나는 뭔가 다른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것 같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아무도 희생하지 않고 모두를 있는 그대로 구원할 수 있는 어떤 방법, 예수나 부처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소시민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내 나름대로 기여할 수 있는 뭔가가 분명히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 개인적인 무력감과 허탈감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길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묘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마도 쥐가 도망가다 길이 막히면 돌아서듯이 나도 엉뚱한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사회적으로도 이렇게 혼란 속에 빠져 있는 나라가 아닌 곳에서 태어났다면, 난 지금 무엇을 고민하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처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슈들로 인해 엄청난 소모와 낭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이런 상황을 벗어난 내 모습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개인적인 무력감과 방황 속에서 나는 멀리 달아나는 길을 택했다. 한국에서는 정신 사납고 혼란스러워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정치적 상황에서 벗어나서 한 인간으로 내 가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었고, 이 속에 휘말리기보다는 거리를 두고 다른 시각에서 우리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과 한국말이 그리워서 찾아온 유학생회에서 피할 수 없이 다시 이 문제들과 마주쳤다. 이곳에 모인 유학생들도 비록 몸은 영국에 있을지라도 마음은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무관심할 수 없었고, 그래서 모이기만 하면 어디에서나 정치 얘기가 나왔다.
마치 우리 모두의 운명처럼, 우리는 어느 누구도 정치적 상황과 역사적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난 모험을 결심했다. 그 지루하고 피곤한 나의 숙명적인 굴레로부터 벗어나서 새길을 찾아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마 그들도 이해했을 것이다, 나의 신경질적 반응은 그만큼 아파하고 있으며, 벗어나고 싶다는 말은 길을 찾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