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짐
한국을 떠나올 때의 불안과 긴장, 영국에 도착했을 때의 기대와 흥분이 가시어 가며 차츰 안정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날은 눈에 띄게 짧아졌고 겨울을 알리는 스산한 바람과 비로 기분조차 눅눅해지기 시작했다. 따스함과 친근함이 그리워지며 한동안 잊고 지낸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몰려왔다.
이렇게 낯선 곳으로 도망치다시피 와서 덩그러니 절대 고독 앞에 마주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것이 내가 원했던 것인가? 내가 찾는 것은 무엇인가? 사춘기 시절 사막으로 가고 싶었다. 그곳에서 절대 고독과 마주쳐 나를 찾고 싶었다. 나는 누구인가? 내 존재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떨쳐 버릴 수 없는 의문의 해답을 찾든지 아니면 아라비아의 로렌스처럼 한 줌의 모래가 되고 싶었다.
나는 지금 사막 아닌 사막에서 처절하게 나 자신과 직면해 있다. 토굴로 들어가서 깨치기 전에는 나오지 않겠다며 면벽하고 있는 사람처럼, 고독과 직면의 시간을 감내하고 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많았다. 그러나 가슴엔 무언가 다 설명되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있었다. 그것은 아직 내 의식의 수면 위로 떠 오르지 않고 선명하게 드러나지도 않지만 내 의식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어렴풋한 기억 같은 것이다. 이참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싶어졌다. 나의 영국행은 이런 내 가슴의 소리를 따라나선 여정으로 이미 어떤 조짐이 일어나고 있었다.
눈을 뜨고서 주위를 둘러보니 여전히 호스텔의 침대에 누워있었다. 창밖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나무들이며, 바람 소리며, 옆 침대에서 곤하게 자고 있는 룸메이트의 코 고는 소리며, 모든 것이 잠들기 전 상황 그대로였다. 내가 현실 세계에 살아있고 모든 것이 여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침대 속으로 되돌아갔다.
다시 꿈속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러나 그게 다였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소용없었다. 단 한 번도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초대받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래도 그 느낌은 생생하게 기억되며, 마치 몇 분 전의 실제 상황처럼 확연했다. 너무나도 특이한 사건이자 경험이었기에 그 흥분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 마치 천사의 품에 안겨 천상의 세계를 살짝 맛보기만 하고 돌아온 것 같은 느낌, 아름답다고 하기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황홀하다고 하기엔 담담했고, 그냥 편안하고 안온해서 마냥 그 속에서 살고 싶은 그런 느낌만이 전해졌다. 마치 사랑의 기운에 휩싸이고 감겨든 듯한 느낌, 무엇에 홀린 것만은 분명했다. 전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신비로운 힘에 의해서 그 일이 벌어져 버린 것이다.
뭔가 분명히 꿈을 꾸고 있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꿈을. 그런데 갑자기 필름이 끊어지면서 화면은 사라지고 느낌만이 전해져 왔다. 마치 잘 나오던 TV 화면이 끊어지면서 음악만이 흐르는 것처럼. 분명 꿈을 꾸면서도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갑자기 필름이 끊어졌다는 것도 의식하고 있었다.
의아해하던 바로 그 순간 너무나도 아름다운 느낌에 흠뻑 빠져 어리둥절하다 겨우 정신을 차렸다. 영원히 그 순간 그 느낌 속에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찰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안개가 사라지듯이 나를 안고 있던 천사가 떠나버린 것처럼... 그래서 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꿈에 대해서는 평소에도 할 말이 좀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보통 꾸어 오던 그런 꿈이 아니었다. 이건 분명 어떤 예감이고 조짐이었다. 내 삶에 무엇이, 어떤 운명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서막 같았다.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알리는 천사의 방문처럼... 평범한 보통사람인 나에게 그렇게 거창한 사건은 아닐지라도 나에게는 필생의 사건이 일어날 것을 알리는 듯한... 그것이 무엇인지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그런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기대에 부풀었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지평선 위로 먹구름이 모여들고 파도가 소용돌이치면서 새들이 날아오르는 그런 드라마 같은 장면은 아닐지라도, 조용히 어떤 그 무엇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 같은 예감에 몸을 움츠리고 촉각을 곤두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