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그리고

r길잡이

by 최선화


평소 머리 한구석에 묻어 두었던 온갖 의문들이 되살아나며 나를 어지럽혔다. 그분은 어떤 종교적 냄새도, 색깔도 없이 그저 지혜로운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종교적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치장하지 않아서 더 마음에 들었다. 정말 자신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당당해서 거추장스러운 온갖 것으로 포장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그런 종교적 의식이 나쁘다고 생각지 않으며 필요성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종교인이 아니라 일반 시민인 나에게 좋은 모범이 되고, 이 세상을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본보기가 되고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것과 그것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모범을 제시해 주는 사람이다. 나 같은 범인도 따라갈 수 있는 자연스러운 삶의 형태 또는 생활로서의 도와 진리를 찾고 싶었다.

물론 학교와 여러 가지 책을 통해서 약간의 지식과 견해들을 읽어왔고 알아 왔지만,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모두 내 삶에 중요한 부분들을 차지하고 있지만, 전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과 이해, 그리고 현실성 있는 기준과 모델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는 예수, 부처, 노자, 톨스토이, 간디, 슈바이처 등 모두가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이상을 원했다. 아직 내 가슴엔 채워지지 않고 풀리지 않은 많은 숙제가 한 구석에 쌓여 있다. 그래서 지식 조각들을 모아 둔 잡동사니가 아니라 이 모두를 정리해낼 수 있는 지혜와 혜안을 원했던 것이다.

피터는 참 호감 가는 사람이었다. 큰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과 언제 보아도 신선하고 갓 따온 홍옥같이 아삭아삭한 느낌이 드는 인물이었다. 그의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씨와 태도는 나로 하여금 친족 같은 가까움을 느끼게 했다.

뭔가 의문이 생기면 나는 피터에게로 달려갔다. 그는 머리가 좋고 내가 하는 질문을 정확히 파악했다. 식사 시간이면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서 많은 것들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속 시원히 대답해 주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느끼고 깨달아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하는 말은 선문답의 화두 정도는 아니라도 결국은 내가 스스로 찾아가고 눈떠야 한다는 것으로 모아졌다.

그래, 그렇지. 내가 스스로 찾아내고 깨달아야지, 그렇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람? 맞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아직 찾아내지 못해서 답답하고 안달이 났다. 그의 대답에 감동되기보다는 일상적인 행동과 태도가 더 가슴에 와닿았다.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며, 문제가 일어났을 때 처리하는 어른스러움이며, 그는 정말 어른다운 어른처럼 느껴졌다. 그는 성숙한 사람이었고 그의 성숙함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어떻게 길러진 것인지 심히 궁금했다.

그들이 말하는 진리를 빨리 이해하고 싶은 졸갑증이 났지만, 그들은 우주적 기운이나 흐름, 생명 등의 추상적이고 모호한 말만 반복했다. 특정 종교가 아닌 모든 종교를 포괄하며 기독교의 성경을 자주 인용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누구나 자유롭게 와서 배우고 스스로 깨쳐가며, 순수한 인간적인 연결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진리는 인간의 작위적인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우주적 질서 또는 생명 자체에 내재된 자연적인 지성이나 힘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이런 말을 동양적으로 해석하면 ‘도’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도를 내가 어떻게 알아내며 내 생활 속에 어떻게 구현해 나갈 것인가? 이것이 바로 내가 그렇게도 원하고 찾던 바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실체는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곳은 인간이 본래 모습을 회복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그들의 표현을 빌면 ‘영성에 의한 삶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그들은 안내자이며 길을 가도록 도와줄 뿐 결국 스스로 깨달아 나가야만 했다. 종교적 틀이 아니라 각자의 개인적 깨달음과 책임이 주어진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이든 스스로 알고 깨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다른 누구의 말만 들으면 된다는 식은 고집 센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가 예수라 할지라도. 예수의 진실을 깨닫고 동참할 수는 있지만 맹종은 곤란하다.

종교적 맹신이 얼마나 많은 우를 범했는가? 평화를 위한 전쟁이 일어났고, 모든 종교가 동일하게 주장하는 것이 사랑이며 행복이지만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에게 가해진 고통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종교의 참뜻을 깨우치지 못했거나, 아니면 종교를 빙자한 세력 확장이나 이권에 개입한 것이 아니겠는가?

진정 예수의 가르침인 진리와 합류했다면 세상은 벌써 구원받았을 것이다. 신이라는 존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긴 수염의 노인으로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셨다면 아마 지금쯤은 지쳐서 포기하고 이미 돌아가 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까무러쳐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혹자는 신은 죽었다고 하는가 보다.

이들은 신과 성령을 말하면서도 개인적인 자각과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마치 기독교라는 배경에다 동양적이고 불교적인 내적 성찰과 개인적인 자각을 한 데 합해 놓은 것 같아 나에게는 훨씬 더 수용하기 쉽고 친근하게 여겨졌다. 그야말로 자기 스스로 도를 닦아나가도록 도와주는 체험장이었다. 그렇다고 소림사처럼 극한의 체험과 고난도의 무술을 닦아야 하는 것도 아니며 생활 속에서 이미 아는 바를 실천하고 배워나가며 스스로 자기 도를 닦는 과정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들은 영성에 의한 삶을 산다고 하지만 나는 영성이 뭔 지조차 알지 못하며 그 또한 나에게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게 뭔지 실체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영성의 실체는 뭔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내 마음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자유로움 속에서 일상의 순간들 그 자체를 화두로 삼으며 사는 것이 흥미로웠다. 순간순간에 충실하며 자신이 아는 것을 실천하고 모든 순간에 초점을 모으며 혼신을 다하는 태도야말로 ‘무시선 무처선’을 실천하고 있는 듯했다. 머리로는 뭐라고 꼭 꼬집어 의식적으로 확연히 잡히지는 않았지만, 가슴으로는 이미 알고 친숙한 것 같았다. 이런 모호하고 몽롱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화와 친족 같은 끌림을 느끼며, 그들이 베푸는 순수한 우정과 사랑 속에서 깊은 휴식과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꿈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