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미클튼에서 내가 사귄 사람 중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할머니가 한 분 계셨다. 비비안은 미클튼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모임이 있을 때면 참가하는 그 동네 할머니다. 비비안은 호텔 바로 앞집에 살고 있어서 나도 미클튼을 방문할 때마다 인사하고 자주 들리며 친하게 지냈다.
비비안의 집은 전형적인 영국식 시골집으로 나의 꿈의 집이었다. 노란 벽돌로 오랜 시간에 걸쳐 남편이 손수 지은 집으로 내부 공간이 약간 불편한 점도 있지만 마치 오래된 골동품처럼 견고하고 잘 지은, 사람 냄새가 나는 단아한 집이었다. 이층 계단이 좁고 구불구불하며 화장실이 멀고 좁은 것이 도리어 오래된 시골집의 소박한 맛을 더해주었다.
지하실의 벽난로는 겨울의 정취를 더해주고 타오르는 난로 옆에 있는 손 때 묻은 캡틴 체어에 앉아서 안경을 코에 걸치고 뜨개질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이 세상 모든 할머니의 전형이다. 정원이 바라다 보이는 식탁에서 그녀가 직접 만든 허브차를 마시며 앉아 있는 시간은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이 집의 정원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꽤나 넓은 정원이 한 군데도 눈 가는 곳 없이 완벽하게 돌봐져서 그 집에 있는 꽃 종류만으로도 식물도감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양의 정원에는 푸른색과 보라색 꽃이 많다. 우리네 정원에는 노랑, 빨강 등 원색이 많은 것에 비해서, 그래서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겨울의 잔설이 남아있는 정원 한구석에 제일 먼저 고개를 쏙 내미는 것은 노란색과 흰색의 크로커스다.
무채색의 정원에 노란 꽃이 귀엽게 고개를 내밀면 그 모습이 얼마나 반갑고 귀한지 모른다. 흰색은 잔설에 묻히거나 눈에 금방 들어오지 않아 한참 지나서야 발견된다. 봄의 전령들이 나타나면 수선화, 히야신스, 튤립 등이 뒤를 잇다 사과꽃과 찔레꽃의 향기가 진동을 하면 벌써 성큼 여름이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집 정원 한구석에 낡아서 비어있는 축사마저도 꽃 무덤으로 뒤덮여 있다. 나는 언제나 여기에서 노는 것을 즐겼고 인정 많고 사랑스러운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참으로 행복했다. 그녀가 나에게 따뜻함과 지지를 보내주는 것도 고마워 마치 고향집 친할머니와 함께 하는 것 같은 푸근함으로 얼마나 큰 마음의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비비안의 집은 평소에 내가 이상적으로 그려온 꿈의 집과 가장 가까운 집이었다. 그래서 내가 집을 짓는다면 꼭 이처럼 지을 것이라 마음먹었다. 아무런 허세도 과장도 없이 절제의 미와 소박한 편안함이 그 자체로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봄이 되면 정원을 가꾸는 일로 소일거리를 삼고, 꽃이 피면 대문을 활짝 열어 누구든지 구경하고 차도 나누며 넉넉한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을 불러 봄놀이도 하며 잔치도 벌일 것이다. 묵어가고 싶은 사람들은 언제라도 와서 편히 쉴 수 있고, 모임의 장소로도 환영하는 그런 집을 지으리라.
이런 나의 꿈인 물리적인 집을 짓기 전에 먼저 내 존재의 집부터 지어야 할 것 같았다. 내 영혼이 안식과 위안을 얻을 수 있고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에게도 평안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존재의 집을. 물질적인 집이야 좀 더 쉽게 만들 수 있지만, 존재의 집을 완성해 나간다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집을 짓기 전에 내 존재의 청사진부터 그려보고 그 바탕을 마련하기 위한 본보기가 나에게는 더 절실했다. 비비안 할머니처럼 모두를 품어주고 듬뿍 사랑해 주기에 모두에게 소중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그런 존재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