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다시 학교로 돌아와 실습지로 배치되어 바삐 지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진리는 무엇일까? 그 할아버지가 말하는 바른 자리와 진실은 무엇일까?
호기심에 차 있는 나에게 피터는 몇 권의 책을 주었다. 저자는 ‘요란다’로 작은 책자들이었다. 한 자 한 자 모두가 가슴에 와닿는 말들이었다. 공감할 수 있는 말들이고 치유적인 말들이었다. 가슴속에서는 잔잔한 감동이 일었지만 그들이 지향하는 것은 작은 책자에서 단편적으로 이야기하는 그 이상인 것 같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머리와 이성적으로 설명하고 언어화할 수 있는 실체는 쉽게 드러나지도 잡히지도 않아 갑갑증만 더했다. 가슴과 머리가 따로 도는 느낌, 뭐라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위로와 평안이 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런 느낌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들의 친절함과 균형 잡힌 태도 때문일까?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했다. 글에 대한 공감으로 내 영혼에 스며드는 위로가 전해졌다. 나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무엇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내 머리로, 이성적으로는 판단이 가지 않았지만 내 가슴을 녹이는 그 무엇이 위로와 충족감을 주었다.
구태여 표현하자면, 그들은 삶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었다. 삶에서의 관념적인 주의나 주장 또는 도덕적이고 교리적인 것보다는 모든 것을 생명의 근원에서 다시 바라보게 하고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즉, 인간의 사회적 속성과 관계에 관한 법칙보다는 생명의 근원과 그 힘에 초점을 맞추며 본질로 돌아가게 했다. 생명은 주어진 것이며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휘말려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인위적인 방식이 아닌 생명의 본질에 대한 이해로 되돌아가 우주적 질서에 준한 삶을 살아가는 모범을 제시하며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었다. 이제껏 길을 찾아왔지만 인간의 이성적 판단과 노력에 의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이들은 내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것들에 대한 희미하고 어렴풋한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어 먼지를 털어내고 묵은 때와 딱지들을 닦도록 도왔다. 사람들 간의 사회적 질서를 넘어선 우주적 질서와의 조화와 생명의 근원과의 합일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경이로웠다.
가슴속의 고독과 허무라는 고질병을 어떤 다른 무엇으로 채워서 대충 넘겨 버리지 말고, 고독의 진정한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라고 했다. 누군가 정해진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내도록 도와줄 뿐이었다. 이러한 과정에 먼저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경험을 나눌 뿐, 대신해 주지는 않았다. 아니 해줄 수가 없었다.
이점이 마음에 들고 신뢰가 갔지만 숙제를 받아 든 사람에게는 힘든 과업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머리를 굴려 만들어 내고 짜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위적인 노력을 그만두고 일상적인 관성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라고 했다. 그보다는 생활과 삶을 통해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겪게 될 것이므로 마음 편하게 지내라고 하니,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내 마음이 급하다고 해도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어릴 적 시험공부하기 싫은 아이들은 급한 마음에 책을 베개 삼아 베고 잤다고 한다. 자는 동안 책에 있는 내용이 머리로 바로 들어올 것 같아서. 조금 더 커서는 영어사전을 삶아 먹으면 단어를 외우지 않아도 알 것이라 믿는 아이들도 있었다. 티베트 사람들은 법륜을 돌리며 다닌다, 경전이 씌어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돌리면 복을 받는다고 믿고서.
순박한 사람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법륜을 돌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 웃음이 났다. 마치 시험공부는 않고 책을 베고 자는 내 어릴 적 친구들 같아서. 경전을 가까이하고 기억하려는 의도는 좋지만 읽고 가슴에 새기며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법륜을 돌리는 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참 소박하다.
남편이 목사라서 자신도 천국에 자리가 이미 마련되었다고 믿고 있는 부인과 같다. 부인 것이 아니라 목사 자리가 마련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죽어서 천국 가는 일은 잠시 미루고라도, 살아서 지금 이곳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찾아가고 깨닫기보다는 이렇게 어떤 것에 편승하거나 쉬운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자신의 삶을 누군가 또는 무엇에 위탁하고 맹신하는 것은 본인의 삶과 생명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 안이한 태도부터 잘못된 것이다. 스스로 책임 있는 삶을 원한다면 우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감부터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내 삶에 대한 진정한 책임을 지려고 나섰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너무 애쓰지 말고 편안히 지내라며 자연스러운 과정들이 저절로 일어날 것이라고 했지만 그게 무엇인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도 않는 것 같아서 뭐라도 해봐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일었다.
그래서 별수 없이 그들이 제공하는 글과 책들을 읽어가며 스스로 깨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이 쓴 글들을 읽을 때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위로와 이해가 생겨나며 지금껏 잊고 지낸 많은 것들을 재 기억시키며 내 영혼이 충족되는 것 같아서 더 몰입하게 되었다.
동양인인 나에게 이럴 때 생각나는 방편이 바로 참선이고 명상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호흡과 마음을 가다듬고 들여다보니 놀랍게도 이미 내 마음속에 여태껏 지녀온 많은 짐을 내려놓음으로써 깊은 평화와 고요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나의 조급하고 바쁜 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살아가는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도 모르게 어느새 긴장의 끈을 풀어버렸고 내 머리를 어지럽혔던 근심이나 잡념들은 뒤로 물러나 새로운 텅 빈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마치 어릴 적 어머니와 같이 갔던 절의 앞마당처럼. 깨끗이 비질해 놓은 빈 공간이 새로운 손님의 방문을 기다리는 것처럼.
이곳과 여기 사람들이 갖는 분위기를 통해서 나도 모르게 내 속에 스며들고 녹아나는 어떤 무엇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어지며 내 속에서 이해와 용서 그리고 벗어남이 서서히 일어나며 나도 모르게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내 존재의 고요한 정점에 머무르며, 그 속에서의 깊은 휴식과 열림 속에 작은 새로운 움직임들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만들어 낸 생각이나 개념이 아닌 어떤 자각, 감응 또는 깨달음 같은 것들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 오르며 서서히 깃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