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어릴 땐 내 존재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의문이 없었다. 사고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자연적인 연결이 존재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차츰 멀어졌다. 무엇이 이런 분리를 가져왔을까?
나이가 들면서 나라는 자의식이 만들어지면서부터 나와 나 아닌 것에 대한 구분이 생겨나고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생각으로 분리가 생겨난 것 같다. 나와 나 아닌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에 대한 판단과 생각들, 이 모든 사고의 근원에는 내 맘대로, 내 생각대로 내 삶을 이끌어 나가겠다는 자의식과 작위적 태도가 바로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되게 한 시초가 아닐까?
성경에서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인간의 사고능력이 개입됨으로써 신의 자리를 넘겨다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일종의 존재론적 반란으로 신에게 복종하는 존재에서 스스로 신의 자리를 빼앗는 반란으로 추방당한 것이거나 아니면 스스로 분리되어 나온 것은 아닐까?
그래서 물고기가 물을 벗어나서야 비로소 물의 존재를 알 수 있듯이, 근원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찾아 헤매는 것은 아닐까?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인간들 간의 인위적인 법칙에 따라 그들의 소망과 계획대로 살아가고 있다. 생명의 근원과 법칙에서, 도에서, 신에게서,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있다. 자신의 계획과 원망 성취에 따라 좌충우돌하며 방랑하고 있는 탕자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넘쳐나는 봄기운을 느끼며 생명과 그 근원은 무엇인지, 나의 삶의 근원은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한 사유가 자연스레 일어났다. 죽은 듯한 빈들을 가득 채우며 아름다운 생명의 물결을 가져온 그 힘과 능력에 감사하는 마음과 외경심마저 들었다. 그 힘과 능력은 분명 인간 위에 건재하고 있으며 인간이 의지해야 할 근원이고, 돌아가야 할 궁극적 고향이 아닐까? 이 힘과 근원의 지류 내지 작은 줄기가 내 속의 샘물로 연결되는 것 같다.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근원에서 뻗어 나왔지만 그 뿌리는 연결되어 각 자의 영역에서 삶을 이어나가는 것처럼.
봄과 부활절은 잘 어울린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봄이 오면 생명과 그 근원에 대하여 그리고 인간 삶의 부활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머리를 넘어선 우주적 힘과 생명의 근원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궁극적인 의문들이 되살아난다.
이런 가치관이 우주관, 종교관, 인생관으로 이어지지만 난 교리화 되고 화석화된 종교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법칙과 원리, 궁극적 존재에 대한 이해와 연결에 더 관심이 갔다. 죽은 종교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과 살아 실천하는 진리와 사랑이 나에게는 더 의미 있으며, 그러한 실체에 대한 이해와 경험에 목마르고 허기져 있었다.
이러한 시장기는 사춘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되어 끝없이 나를 괴롭혔고, 가슴에 나 있는 커다란 구멍은 채울 길 없으며 가끔씩 찾아드는 허무라는 불청객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살아가고 있는데 왜 나만 이런 고질병에 시달려야 하는지, 남들도 당하면서 말을 않고 참고 있는 건지, 내가 신경증에 걸린 건지, 아무튼 나에게는 이런 의문과 숙제들이 다급하고 현실적인, 삶에서 간과할 수 없는 과제로 나를 조여 왔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들이 조금씩 풀어지고 해답이 주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는 어떤 방탕한 사람의 모습이 아닌 생명의 근본을 망각한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인간 속성에 빠져 생명의 근원을 잊어버리고 그 근본의 특성인 신성을 잃어버린 우를 범한 것이다. 나의 삶을 내 의지대로 이어가려는 무거운 짐과 멍에를 지고서 방황하며 힘들어하고 있었다.
솔로몬의 영광도 한 포기 들꽃보다 못하다고 했는데... 더 큰 초월적 존재인 아버지에게 귀의함으로써 멍에를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도와 가치는 이미 존재한다, 내가 애써 만들 필요가 없다. 내 삶의 의미와 가치도 이미 존재한다. 문제는 나 혼자만의 가치와 의미를 찾을 것이 아니라 전체적 의미인 도와 근원과 연결됨으로써 그 안에서 내 존재의 의미와 가치도 함께 찾아지는 것이다.
‘수고하고 짐 진 자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는 구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화석화된 말씀이 아니라 내 삶의 지침으로 나와 함께 호흡하며 살아 움직이는 말씀으로 진리로 다가왔다. 수 천 년 전 일어난 일, 어떤 민족이나 개인에게 일어난 일이 아닌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삶의 원리를 전해주는 것으로서의 성경의 의미가 새롭게 느껴졌다.
창조는 태초에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나 자신도 존재의 집을 새롭게 개조해가고 있다. 그럼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우주적 창조에 동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