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
생활의 발견
날씨가 좋아지기 시작하자 유럽 각 국에서 영국의 봄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봄은 영국에서’라는 모토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모여들어 미클튼은 손님으로 넘쳐났다. 미클튼에 내가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들이 쏟아졌다. 주로 손님맞이 객실 준비를 위한 청소와 침대 만들기로 하루 종일 바빴다.
하기야 입산하면 절에서도 부엌일과 뒷바라지를 3년은 해야 한다지 않는가! 하심을 기르기 위해서, 속세에서의 교만과 아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하고 낮은 일을 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나도 열심히 도왔다. 일을 하는데도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난다. 특히 손님을 위해서 준비하는 태도는 그 사람의 정성에 따라 손님들이 느끼는 것에 차이가 난다.
그래, 인격과 품위는 고상한 말로서가 아니라 그릇을 씻고 화장실 청소를 하는 데도 나타난다. 장사해서 돈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가족을 맞는 듯이 정성을 다했다. 힘든 노동을 하는 것도 즐거워하며 그 순간의 의미와 가치를 발휘하며 즐겁게 일했다. 부엌일은 더더욱 그랬다. 사람이 먹는 음식은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전달된다고, 그래서 지식과 함께 맑고 깨끗한 기운으로 준비해야 한다며 정성과 축복의 마음을 쏟았다. 내가 처음 도착했을 때 느낀 이곳 분위기의 비밀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처리해야 할 일들을 해치우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기회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창조의 순간으로 이어나갔다. 이것이 바로 삶의 기술이고 예술이다.
어릴 적 언니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려 나도 기억하는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이 생각났다. 그 책이 어떤 내용이기에 저렇게 자주 말하는지 크면 꼭 읽어보고 싶었다. 중학교 때 그 책을 보니 작은 글씨에 빼곡히 쓰인 내용이 정말 시시했다. 음식이야기가 많았고 ‘중국인은 네 발 달린 것 중에서 책상 빼고는 다 요리한다’는 말밖에 기억나질 않는다. 나에게는 참 재미없고 시시하게 느껴졌다. 고등학교시절 어느 방학 때도 다시 시도했지만 너무 오래된 책의 퀴퀴한 냄새 때문에 영 비위가 상하는 데다 역시 나에게 흥미로운 내용이 아니어서 접어버렸다. 그래서 ‘생활의 발견’이라는 제목만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사춘기부터 무미건조한 일상성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느꼈던 허무감과 답답하고 숨 막히는 듯한 무의미의 늪이 나를 덮칠 때마다 생활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싶었고 임어당이 발견한 생활이 무엇인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의미를 중국이 아닌 영국 이곳에서 발견한 것이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내 존재의 표현이며 나를 통한 창조의 과정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순간순간 모두가 축복을 나누는 치유의 기회라는 것을 발견해낸 것이다.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내 삶의 모든 순간이 축복과 치유와 새로운 창조의 순간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순간순간에 몰입할 수 있고 미루거나 죽은 후에 천국 갈 것을 기다리는 삶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 주어진 모든 것이 나로 인해서 풍요로워지고 아름다움과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 이보다 더한 예술과 철학이 어디 있을까?
나에게는 이것으로 흡족하고 살아야 할 이유와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으며 충분히 만족했다. 불교에서 자주 인용되는 육조 혜능의 이야기처럼, 선사들이 한순간 도를 깨치는 것이 시시한 일상생활에서 문득 눈을 뜬다고 하더니 나도 그렇게 무의미하게만 느껴졌던 일상성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나날이 새로운 날이라고 하더니 순간순간이 새로우며, 내 존재의 가치를 표현하는 기회와 창조의 영역으로 다가왔다. 생활의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아니 이제야 진정한 의미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삶의 가치와 의미는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지만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임어당도 ‘생활의 발견’이라고 했나 보다.
나에게는 개안과 같은 발견이며 온 우주가 다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며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도 하품을 하며 지루해하고 무의미하던 일상과 일들의 의미를 이제야 찾아낸 것이다. 도산 안창호선생이 미국의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던 초기이민 노동자들에게 ‘조선의 독립은 오렌지를 잘 따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한 말의 의미도 공감하게 되었다. 이렇게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주어진 순간에 충실하고 그 순간의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 바로 도이고 진정으로 사는 길이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 들은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느 날 문득 깨달음을 얻은 한 동자가 미친 듯이 기뻐하며 ‘세상 어디에도 부처 없는 곳이 없고, 부처 아닌 존재가 없다며’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는 그 마음이 이해가 갔다. 나도 동네를 한 바퀴 돌며 모든 존재에게 축복의 미소를 보냈다. 아니 즐거운 웃음이 자연스레 번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