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그리고

불꽃

by 최선화


학기가 종반에 접어들면서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좋아하던 그림들을 실컷 보고 싶었다. 그런데 마틴이 영국으로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원래 영국인이며 귀족 출신으로 상원의원이었다. 그가 온다고 하니 직접 만나서 그의 존재를 느껴보고 싶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포기하고 학교도 빠지며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를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져 여행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마음 졸이며 온갖 기대와 상상 속에서 마틴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다.

미클튼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북적대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들은 모두 동원되어 손님맞이 준비로 뛰고 있었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오후 티타임에 모여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다 우연히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내 눈을 의심했다.

몇몇 사람들이 그들의 머리 뒤에 황금색 테를 두르고 있는 게 아닌가? 명동성당 천주교 용품점에 있는 그림에서나 본 것이 실제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너무나 이상해서 그 사람에게로 가서 말을 건넸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서, 그러나 본인은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고 나와 비슷한 보통사람이었다. 도대체 이것이 뭐란 말인가?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정원 쪽으로 돌아서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정원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의 온몸이 불덩이에 휩싸여 있지 않은가? 성경에서 모세가 보았다고 한 것처럼. 얼마나 숨을 죽였는지, 누군가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난 영원히 숨을 멈추었을지도 모른다. 한참을 눈을 감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며 내가 목격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마음에 새겨 두었다. 엄청난 일을 목격한 증인이 되어야 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정신을 수습하고 나서 조용히 생각해 보니 사랑할 때도 불이 켜진다고 하는데, 인간이 사용하지 않고 있는 많은 능력들이 잠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짐작쯤은 가능했다.

저녁 식사시간에 한 여성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 사람은 나에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낮에 내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본 것들이 나에게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사람이 보았다고 하는 순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무심히 식사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 그게 맞을 게다.

어떤 초월적 현상은 인간적인 사고에 몰입하는 순간이 아니라 텅 비어있는 무심의 상태에서 우주의 근원적 기운이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텅 빈 악기를 통해서 음악이 흐르듯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식이 비워짐으로써 우주의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힘과 능력이 인간을 통해서 이 땅에 온전히 전달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생명체가 그렇게 살아가듯이 인간도 근원과의 연결을 통해서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여성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내가 보았던 현상들은 사람의 본래적 모습의 일부이며, 사람의 의식이 비워졌을 때 우주적 기운과의 합일이 일어날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성이 발달한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온전히 비어있고 정화된 사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자연적인 현상일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한테도 일어났다고 하니, 누구에게나 순간적인 천사의 강림과 성령의 은총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천사는 찾아들 곳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본 그림 하나가 생각났다. 예수께서 문을 두드리며 밖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지금 이 세상에 예수가 다시 나타난다면 과연 사람들이 그를 알아볼 것인가? 정신병자로 몰아세울 가능성이 더 클지도 모른다. 구세주가 누울 곳이 없어 구유에 눕는 것처럼 천사도 깃들 곳이 없어 떠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인간이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신성과 속성이라는 긴 잣대의 어느 지점을 각자의 존재의 질에 따라 점유하고 있기에.

예술의 위대성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깨우며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재기억시키고 되새기게 하는 능력이 있다. 성인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에는 후광이 있었다. 으레 그리는 것이려니 하고 무심히 넘겼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의 진면목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누구나 자신의 영혼을 닦은 사람들은 광채를 발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녹이 난 동전같이 지저분해 보이지만 박박 문질러 때를 벗기면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일 것이다. 동전 한 닢이라는 시처럼.

‘흙 속에 묻혀 삭아들지 않고

발바닥에 밟혀 누그러들지 않고

차바퀴에 깔려 오그라들지 않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지만 소중한 동전 한 닢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 도를 닦는다고 하나 보다. 도는 이미 존재하며 닦음으로써 빛날 수 있게 된다. 성경에도 빛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다. 그 빛이 상징적 의미로만 생각되었지 물리적 현상과 실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이제야 생각해 보니 분명한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분위기가 바뀌고 훤해지는 기분이 들었었다. 모두 생기 있고 활기차며 훤칠해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기쁨과 흥분으로 들떠서라고 생각했을 뿐이었지만, 뭔가 공기가 확연히 달랐으나 내가 너무 흥분해서 당연시했던 것이다.

그렇게도 그 존재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파악할 수도 없어 모호하기만 했던 성령의 실체를 조금 더 알고 체험한 것 같기도 했다. 성령은 어떤 기묘한 것으로 그것이 나타날 수 있는 적절한 분위기나 아니면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존재할 때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충분한 수양을 한 사람에게서 드러날 수 있거나 아니면 충분히 비워짐으로써 하늘의 뜻이 전해질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었을 때 드러나는 어떤 신묘한 기운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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