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그리고

파리로

by 최선화


대학 동창인 미옥이로부터 다시 편지가 왔다. 아무래도 자기가 영국으로 오는 것이 힘들 것 같으니 나 보러 파리로 오라는 것이었다. 지난번의 배 멀미는 생각만 해도 아찔해서 이번에는 비싼 배를 타기로 했다. 물속에 잠겨가는 것보다 물 위를 미끄러져 가는 배는 파도가 덜 했다.

파리행 테제베 차창으로 보는 풍경만으로도 프랑스는 영국보다 더 크고 넓었다. 강가를 따라서 줄지어 서 있는 버드나무는 낙동강변의 버드나무를 연상케 했다. 버드나무가 어느 곳에서나 물가를 따라서 있듯이 땅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나 삶이 이어지고, 사는 모습은 모두가 비슷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처럼, 그러면서도 또한 나날이 새로울 수 있듯이.

파리 역으로 미옥이 내외가 마중을 나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에게 급한 것은 화장실이었다. 돈을 지불하는 화장실은 참 낯설었다. 인간의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돈을 내야 한다면 돈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나? 미개국도 아닌 파리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역에서조차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어떡하나? 괜스러운 걱정이 먼저 일었다.

파리대학 유학생들을 위해서 마련된 기혼자용 아파트는 파리에서 40분 정도 떨어진 ‘앙또니’에 있었다. 장학생들에게만 특혜로 주어지는 귀한 아파트라지만 참 기가 막혔다. 프랑스 영화에 나오던 낡은 아파트들을 기억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원룸에는 최소한의 욕구만을 채울 수 있는 공간과 살림살이로, 낡은 유리는 깨지고 아마 10년 넘어 한 번도 닦은 일이 없는 듯했다. 친구의 따뜻한 마음과 대화가 없었다면 그곳에서 지낸다는 것은 상상키 어려웠을 것이다.

영국에서 내가 묵는 호스텔이 얼마나 좋은 최신시설이었는지 새삼 비교가 되었다. 추운 날 코인을 넣어야만 불이 들어오는 난방시설을 보며, 인색함에 질려버렸지만 그래도 외국인에게는 그냥 언제나 틀 수 있게 해 준 것도 큰 배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학생복지시설이 세계에서 가장 잘된 곳으로 파리대학을 치지만 그 실상은 난감했다. 그래도 큰 희망과 꿈으로 살아가고 있는 유학생들에게는 아름다운 젊은 날의 추억거리일 것이다.

미옥이네 집에 도착해 보니 사정이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당연히 같이 구경 다닐 것으로 여겼는데 임신으로 몸이 좋지 않았고 다닐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몸이 무거워 다리가 붓고 일상생활을 하기에도 불편을 느끼고 있어 난감했다. 모든 것을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아예 생각을 달리 했을 텐데...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친구를 조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바쁜 미옥이 남편이 나를 위해서 시간을 낼 수도 없고, 겨우 시간을 쪼개서 하루 정도 구경시켜줄 것이라고 하니 더 이상은 바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다 포기하고 집에서만 지내려니 정말 갑갑해서 안 되겠고... 할 수 없지, 혼자서라도 돌아다녀야지, 몇 군데는 이미 보았지만 그래도 내가 꼭 가보고 싶은 곳들이 있으니 혼자서라도 찾아 나설 수밖에.

다음 날 아침 친구로부터 필요한 불어 단어 몇 가지를 배웠다. 일상생활로 되어 있는 미안합니다, 실례합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입구, 출구, 갈아타기 그리고 할인을 받기 위해서 파리 왕복표 주세요, 모두 여섯 단어로 충분했다. 급하면 영어를 쓰면 되고 고등학교 1학년 때 1년간 배운 불어가 기억에 약간은 남아있어 괜찮았다. 불안해하는 친구를 도리어 위로해 주며 지도 한 장과 여섯 개의 단어로 파리 시내 관광을 위해 혼자 나섰다.

파리행 지하철에서 우연히 한 중년 여성과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호주 출신으로 혼자서 유럽 여행 중이라 해서, 혼자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같이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랬더니 아는 친구가 한 사람 더 있다며 에펠탑부터 가자고 했다. 그림에서 보는 탑과는 달리 실제로 보니 흉물스러웠다. 실망하는 기색으로 서 있는데 그녀는 젊은 아랍 남자를 소개했다.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남자는 아랍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대한항공 선전에 나오던 터번을 쓴 아랍인의 부드럽고 신사적이며 기품 있는 모습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 아랍 남자가 나에게 던진 첫마디가 ‘정말 예쁘다’였다. 아랍 남자의 눈에 예뻐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하루 종일 기분 좋았다. 점심 식사 후 퐁피두 광장에서 우리는 모두 헤어졌다. 각자 가고 싶은 곳이 달랐던 것이다.

나는 로댕 박물관을 꼭 가보고 싶었다. 고등학교 시절 로댕의 작품을 정말 좋아했었다. 로댕 하면 미술책에 나온 ‘생각하는 사람’을 떠올리지만 그보다 나는 ‘다윗상’을 훨씬 더 사랑했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다윗상은 나의 우상이었다. 박물관은 그리 크진 않았지만 화첩으로 볼 수 없었던 많은 작품들이 있어 흥미로웠다. 다윗상은 생각보다 작았지만 여전히 멋있고 아름다웠다. 인간 모두가 저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을까? 인간이 신의 모습을 회복한다면 저런 모습으로 되는 것이 아닐까? 여전히 매력적인 작품을 실컷 볼 수 있어 좋았다. 이제는 다 둘러봐서 특별히 더 가고 싶은 곳은 없었지만 레마르크의 소설에 나오던 장면들이 떠올라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피어난 사랑과 생명에 대한 존중과 애착들,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으로 몰린 다음에야 모든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알게 되는 인간의 우둔함과 전쟁이라는 용서할 수 없는 죄악 속에서 빛을 발하는 인간애와 남녀 간의 사랑... 대학시절 빠져본 프랑스 문학작품과 영화 장면들이 뇌리를 스쳤다.

벼룩시장과 예술가들의 집결지를 돌아다니며 책이나 영화에서 본 장면들을 찾아다녔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파서 관광안내도에 있는 거리를 기웃거리며 식당을 찾고 있었다. 보헤미안들이나 가난한 예술가들이 즐겼을 것 같은 알제리 식당으로 들어갔다.

오래되고 좁았지만 도리어 친근함이 있어 좋았다. 소설에서 읽었던 양고기와 수프 그리고 레드 와인을 실컷 마셨다. 식당은 젊은 사람들로 붐벼 시끌벅적하고 음식 냄새와 연기, 대화와 웃음으로 활기가 넘쳤지만 난 이미 지쳐있었다. 하루 관광은 이것으로 충분했고, 더 이상은 과욕으로 몸살 날 것 같아 친구 집으로 돌아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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