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그리고

탈출극

by 최선화


지하철 환승장에서 연주하는 첼로의 아름다운 선율에 젖어보기도 하고 에스컬 레트를 타면서부터 끝까지 키스를 나누는 젊은 연인들을 바라보기도 하며 앙토니에 도착했지만 여전히 배는 부르고 해도 남아있었다. 좁은 아파트로 가려니 숨이 막힐 것 같아 망설이다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근처에 한 성이 있는데 학생들을 위해서 일부를 개방해 준다고, 그래서 가끔씩 산보를 간다고.

성안에는 늦은 시간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십 대 청소년 한 쌍이 킬킬대며 지나갈 뿐. 호수 주위를 돌고 있는데 노인 한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돌며 뭐라고 소리쳤지만 관심도 없었다. 큰 호수를 한 바퀴 돌고서 아파트로 가면 바로 잘 수 있도록 소화도 되고 적당히 운동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호수는 너무 컸고 어두워지자 갑자기 한기가 돌았다. 돌아가기 위해서 문 쪽으로 와보니 문이 잠겨있었다. 이를 어쩌나!! 그런데 참 이상했다. 일반 사람들이 출입하는 성문이 잠긴다는 사실이, 주변을 둘러보니 안내문 같은 것이 있었고 시간이 적혀 있었다. 아마 성문 개방시간을 알리는 내용인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자전거 탄 남자가 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시간이 다 되었으니 나가라는 말이었나 보다. 비로소 나는 혼자 성에 갇혀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녁에 마신 포도주로 약간 알딸딸하던 것이 순식간에 깨어난 것이다. 갑자기 한기가 들고 호숫가의 까마귀들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냥 있다가는 감기가 들 것 같고 벤치에서 잠들었다가는 까마귀의 습격을 받을 것 같았다.

우선 쓰레기통을 찾기 시작했다. 신문지나 종이를 구하기 위해서. 옷이 없으니 추위를 막기 위해 종이를 구겨 옷 속으로 채워 넣었다. 공기층이 추위를 막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잠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밤새워 호수 주변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벌써 11시니까 새벽 4시 정도면 밝아질 것이고 5시간만 견디면 될 것 같았다. 저녁에 마신 와인 때문에 목이 말랐다. 식수도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 찾아야 했다. 당황해서 허둥대며 이리저리 상황을 정리하고 나니 맥이 탁 풀려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다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분명 사이 문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성이라면 사이 문이 아닌 정문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정문은 보이질 않았다. 멀리 보이는 성의 방향으로 볼 때 정문은 분명 오른쪽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물도 찾아야 하고 할 일도 없으니 오른쪽으로 걸어 나갔다. 한참 후에 거대한 정문이 나타났다. 그렇지만 수위실도 없고 문은 철통으로 굳게 잠겨있었다. 그래도 정문에는 불이 켜져 있어 밖으로 내다볼 수 있었다. 철문의 쇠창살을 붙잡고 멍하니 서 있었다.

혹시나 지나가는 행인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아예 하질 않았다. 유럽에서 한밤중에 그것도 교외에서 사람들이 걸어 다닌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택가나 특별히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 아닌 한은. 더욱이 이곳은 교외로 나가는 인터체인지로 고가도로 위로 차들이 쌩쌩 달릴 뿐, 성문 앞 도로를 지나는 차조차 이미 끊어져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피곤한 몸을 철문에 기대고 있다 잠깐 졸았던 것 같다.

무슨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차 두 대가 성문 앞 광장에 들어온 것이다. 나는 무조건 소리를 질렀다. 나는 불어가 부족하고 그들은 영어를 못했다. 그러나 상황은 뻔한 것이었다. 그들은 경찰을 불러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나는 벌써 안쪽에서 철문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남자 둘은 밖에서 올라오고 아이들은 갑자기 벌어진 장면에 흥분해서 날뛰고, 부인인 듯한 여성들은 얼른 차에서 담요를 꺼내 바닥에 깔고. 그러나 성문 중간 지점에서 우리는 모두 멈추어 서버렸다.

철책이 중간에는 너무 높아서 아무도 기어오를 수 없었던 것이다. 성문을 만든 사람은 우리처럼 기어오르는 사람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아무도 오를 수 없도록 높은 간격을 두었다. 남자들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이들도, 부인들도 모두가 다 숨을 죽이고 멈추어 버렸다.

순간 나는 남자들에게 손짓을 했다. 두 남자 모두 내 앞으로 와서 몸을 낮추고 앉으라고 그리고 한 남자에게 다른 남자의 어깨 위에 오르게 하고 나는 두 남자의 어깨에 올라서서 서라고 했다. 그러자 겨우 위쪽 철책에 내 다리를 걸칠 수 있었다. 맨 꼭대기의 좁은 철책 사이로 몸을 돌려 겨우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곡예단에서 본 장면이나 특공대의 침투 작전 그대로였다. 한국의 군사문화가 이런 비상시에 나에게 큰 힘이 될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던 일이다.

아래에서 여성들이 소리쳤다. 나 보러 뛰어내리라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몸집이 작아서 그들이 보기에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어린아이들까지 나를 받겠다고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고 우스웠다. 적당한 높이에서 뛰어내렸고 그들이 나를 가뿐히 받아주었다.

프랑스인 특유의 호들갑스러움이 벌어졌다. 모두 껴안고서 소리를 지르며 빙빙 돌고 춤을 추었다. 아이들은 두 팔을 벌려 개선장군 마냥 소리치며 뛰고 있었다. 2차 대전 때 파리 입성 시 개선문을 통과하던 드골 대통령과 파리 시민들의 열광하던 모습 같았다.

그들은 교외로 소풍을 나갔다 너무 늦어졌고 잠깐 쉬기 위해 차를 멈추었다고 한다. 이미 새벽 2시였다. 그들은 서둘러 떠났고 나는 아무도 없는 적막에 싸인 길을 두려움 없이 의기양양하게 아파트로 돌아왔다. 친구는 혼자서 나가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내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전화통만 붙들고 있었다고 한다.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이 오려니 하고, 그러나 전화조차 없이 들어오지 않자 안절부절못하고 경찰에 실종신고를 내려던 참으로, 잠도 못 자고 사색이 되어 있었다. 나를 보자 반가움과 원망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그날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자 기가 막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친구는 남편 따라 파리로 온 지 몇 년이나 되고 불어도 제법 잘하지만 혼자서 나갈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단어 몇 자 익히고 나가서 온갖 모험을 다하고 왔으니 자신은 헛살았다는 느낌이 든 모양이었다. 나도 대신해줄 남편이 있었다면 똑같았을지 모른다. 내 친구도 혼자였다면 나보다 더 잘했을지도 모른다.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 모두 위에 존재하는 절대적 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며 때로는 나의 의식으로 때로는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나 천사는 존재하며 우리를 보호하고 이끌어 준다. 그래서 그런 존재와 그 무한능력에 기꺼이 나를 내맡기고 귀의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저절로 우러나왔다.

친구 남편은 다시 나를 혼자 내보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며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다음 날은 공부와 일을 접고 아예 나를 안내하기로 마음먹었다. 베르사유 궁전과 정원들, 그리고 한국인 유학생들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영국으로 오기 위해 역으로 나왔다. 기차 시간이 다 되어가자 배웅 나온 친구가 갑자기 내 손을 끌었다.

가방에서 내가 세상모르고 자는 동안 새벽부터 준비한 김밥을 꺼냈을 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파리 역에서 먹은 친구가 싸준 김밥은 이래저래 내 목을 메이게 했다. 내 생에 가장 감격적인 김밥을 나는 친구와 파리 역 앞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서 목이 메가며 먹었다. 그날 내가 먹은 것은 김밥이 아니라 친구의 우정과 따뜻한 배려 그리고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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