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그리고

단초

by 최선화

끊임없이 질문을 퍼붓는 나에게 피터는 세미나가 열릴 것이니 참가해 보라고 했다. ‘삶의 예술’이라는 제목의 세미나였다. 책에서 읽은 요란다와 마틴의 글과 육성 테이프를 통해 삶의 법칙, 창조의 과정, 의식의 정화와 성경 이야기 등으로 구성되어 참으로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삶의 법칙에 대한 내용에서 삶이 섭리(design)와 역사(control)가 있다는 말이 흥미로웠다. 삶에는 만들어진 의도인 기본 구상과 조정장치가 있으며 인간이 관여하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섭리라는 밑그림과 의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흔히 말하는 운명일까? 아니면 만들어진 용도일까? 그렇다면 인간을 만든 의도는 무엇인가?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세상에서 신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

신의 형상에 가장 가깝게 산 사람이 예수고 부처라고 할 수 있다. 하기야 이 땅에서 삶이 지니는 밑그림과 구상을 펼칠 수 있는 신의 대리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뿐이지 않은가? 조정장치나 관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을 관리하고 조정하는 힘이 있다면 인간이 스스로 노력할 것이 아니라 그 조정대로 살아가면 되지 않는가? 그런데 그런 조정의 신호를 어떻게 알며 어떻게 전달받는가?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는 ‘내 안의 아버지’라고 표현했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만 그 아버지가 존재하는가? 나는 내 안에 샘이 흐르는 것 같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같은 현상에 대한 다른 표현인가? 모든 생명체에 분화되어 있는 우주적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흐름이 있다면 스스로의 의지와 계획이 아니라 그 흐름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흐름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더욱이 그것에 의지해서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가?

그보다는 자신의 머리와 이성으로 짜낸 계획과 방법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는가? 서양문명이 그렇고 이성과 논리를 훈련하는 학교 교육이 그렇다. 머리를 굴려서 힘을 얻고 돈을 벌며,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목표처럼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모두와는 상관없는 초월적 힘에 귀의하라고 하지 않는가? 지금 인류의 삶은 이러한 실체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닌가? 인류 역사가 전개되어온 방향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획득해 나온 과정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를 거스르는 것이며 도대체 그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 가능키나 한 것인가?

칸트가 말했던가? 진정한 자유는 복종에서 나온다고. 더 큰 것에 대한 복종이 없는 자유는 방종으로 흐르며 결국 자기 파멸로 이어지게 된다. 더 큰 질서에 준한 자유일 때 진정한 자유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큰 것은 무엇이며 어떤 질서에 준한 것인가? 그것이 바로 우주적 근원에서 발원한 생명과 사랑으로 사랑의 흐름인 조정이 아니겠는가? 작위적인 인간의 삶의 방식에서 까마득히 잊어버린 전혀 새로운 길을 재 기억시키며 그것이 바른길이라고 다시 알려주고 있다.

인간의 이지적인 계획과 이성을 넘어선 초월적 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조물주 또는 천지신명’으로 표현해왔고 서양에서는 ‘아버지’ 또는 ‘하느님’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노자는 이러한 흐름에 따라서 사는 것을 무위자연이라고 했다.

도라고 하면 세상에서 한 발 벗어난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로 세상의 법칙과 게임에는 맞지 않는 관념적 이상쯤으로 여기고 있다. 생활 과정으로서의 도, 생활 속에 뿌리내린 도가 내가 찾고 추구하는 것이며, 이 세상에 몸담고 살면서 실천할 수 있는 가치로서의 도가 세상의 허기와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양식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겨 왔다.

아니면 어렵고 관념적인 말에서 벗어나서 본래적 의미로 돌아가서 우주적 근원에서 나온 힘, 기운 또는 영(spirit)이라는 말이 살아 움직이는 실체를 더 친근하고 알기 쉽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더 적합한 표현일 것 같다.

종교라는 낡은 옷은 누더기처럼 기워져 신선함과 생동감이 부족하다. 애초에 종교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과 영의 움직임인 기운이 있었을 것이다. 나비는 살아 움직이며 꽃에서 꽃으로 사랑을 전할 때 나비라 할 수 있지 포르말린에 절여 핀에 꽂아둔 것은 나비가 아니라 나비의 시체일 뿐이다.

이처럼 종교는 화석화된 지 오래되어 생명의 기운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바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민간신앙에서 천지신명 또는 조물주라는 말로 표현되는 그 무엇인 근원이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이며 순응해야 할 아버지이고 신이며 주인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기운과 생명력이 어떻게 나의 삶에서 표현될 수 있는가? 내 속에서 솟구치는 샘물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순간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게 되면 그 순간에 주어지는 영감 또는 축복이 적절한 표현으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간순간 개인적인 생각이나 계획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주어지는 영의 흐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영적 전달체로서 온전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처 받고 더럽혀진 우리 자신이라는 도구를 정화하고 닦아서 왜곡이나 사심 없이 온전히 전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어떤 능력을 가졌다며 그것을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올바른 사용만이 지속성과 그 힘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퍼낼수록 더 많이 고이는 샘물처럼. 그 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청소하고 관리해 나가야 하는 것처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속에 이런 알려지지 않은 실체 내지 무엇에 대한 기억이 남겨져 있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기억들이 서서히 올라오면서 우리를 자극했던 기억들이 있다.

위험한 순간을 극적으로 피할 수 있었던 일, 생각지도 않은 말이나 행동이 필요한 순간에 튀어나와 모두를 놀라게 한 일 등등이 수없이 많았다. 아니면 이런 근원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겪어왔던 일들로 실체를 전혀 알 수 없는 허망함과 슬픔은 어디서 왔으며 왜 주기적으로 찾아와서 괴롭혔는가?

융은 집단 무의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 보다 더 깊은 심연에서 기인하는 아직도 탐험하지 않은 미답의 영역으로부터 유래한 것은 아닐까? 영혼, 생명, 신 또는 영성과 조물주라는 말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며 내 삶 속에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알지 못해 헤매던 기억들이 있다.

가슴 한 구석에서 어느새 슬그머니 나타나는 허무와 텅 빈 느낌과 절대적인 고독감은 어디서 오며 왜 나타났는가? 삶에서 중요한 실체를 잊어버렸거나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실체와 근거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은 어디서 오는가?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텔레파시 또는 예지력 등등의 막연한 생각과 느낌들이 내 의식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더구나 내가 스스로 의도해서 선택하고 노력해서 이룬 일들이 과연 최고의 선택이었는지도 의문이 든다. 그리고 일이 순리에 따라서 풀려나가는 과정들을 지켜보았고 애를 쓰다가 안 되면 그때는 모든 것을 던져버리며 순리에 맡긴다, 하늘에 맡긴다며 손을 놓아버렸던 일들이 많았다.

이런저런 기억들과 함께 묵은 숙제들을 다시 들추어 보며 내 속에 어떤 예감과 영감이 자리 잡기 시작했고 미답의 세계가 서서히 눈앞에 펼쳐지며 새로운 탐험과 모험을 부추기고 있다. 아니, 이미 배는 어느새 항구를 벗어나서 더 넓은 미지의 바다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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