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그리고

삶의 예술

by 최선화


삶의 예술 세미나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신 또는 근원에 기반을 둔 삶의 창조와 재창조 과정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당장 나에게 드는 의문은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 내 속에 얼마나 있는가? 더구나 이 존재를 내 삶의 준거 기반으로 얼마나 깊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였다.

신이라면 언제나 약간은 모호한 존재로 저 먼 닿을 수 없는 존재로만 여겨졌는데.... 그것에 기초한 삶이 가당한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이제껏 활용해온 내 생각과 의지는 어떻게 되는가? 물론 마음 한구석에는 더 큰 힘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과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존재는 언제나 내 삶의 전면이 아닌 뒷면에 배경으로,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만 여겨졌다. 그런데 그것을 확고한 내 삶의 근본과 구심점으로 삼으라고 한다.

그렇다면 다시 신이란 무엇이며 어떤 존재인가? 에 대한 물음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저 먼 우주 공간 어딘가에 있는 실체가 모호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적 기운이나 에너지, 생명의 근원이라면 수용 가능하며 나와의 연관성도 더 쉽고 가까이 느낄 수 있다.

자연현상들을 관찰해보면 동물이나 식물들은 이미 생명의 근원에서 나오는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 기러기가 날아갈 방향을 어떻게 알며 꽃이 개회할 시기를 어떻게 아는가? 이들 모두를 작동시키는 우주적 힘 또는 근원적 원리가 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는 그런 근원의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도 똑같은 법칙에 따라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원시시대나 수렵 채취 시대에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인간 문명과 이성의 발달로 인해 언제부턴가 이러한 근원으로부터 멀어져 오다 이제는 영영 길을 잃은 것은 아닐까? 생명의 근원과 그 힘으로의 회귀는 한편에서는 상식적이고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신 또는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통해서 드러나고 작동하며, 이런 속에서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보이지 않는 섭리와 말씀이 인간을 통해서 이 땅에 보이는 형태로 드러나게 하는 연결고리가 바로 인간이다.

모든 진정한 창조는 이런 원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우주적 음악, 천상의 소리가 흐를 수 있는 통로가 인간이며, 그러기에 인간이라는 도구가 원음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렇게도 찾고 싶었던 내 존재의 가치와 의미도 생명의 근원에서 나오는 역할을 온당하게 하는 것이다.

인내천, 천지인이라는 용어는 익숙하며 동학이나 종교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개념과 이치를 넘어서 실질적인 생활 속에서의 실체로써 그렇게 살라는 것이다. 내 삶에서 엄청난 결단과 전환이 요구되는 지점에 도달한 것 같다. 너무도 큰 요구 앞에서 당혹감과 함께 숨을 멈추고 꼼짝없이 굳어져 버렸다.

그런데 이렇게 머리로는 쉽게 이해가 되는데도 내 안에서 쉽게 수용하지 못하는 저항 또는 두려움 같은 무엇이 남아있다. 이것이 오랜 습관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인간의 작위적 삶에 대한 미련과 애착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근원적 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면 이제껏 나라고 착각하고 믿어온 모든 것을 던져버려야 하는 두려움 때문인지, 그 어떤 것 아니면 그 모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 내린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한꺼번에 쉽게 던져버리지 못하는 무엇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다.

그래, 이게 정직한 마음이다. 내 삶에 대한 대전환은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한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헌신짝 버리듯 돌아서 지지 않는 것이다. 오랜 지병과 상처가 차도를 보이며 아물어가는 것처럼 서서히 나아지고 익어지며 확장되어갈 것이다. 그러기에 순간순간 도를 닦는 마음으로 초점을 맞추어나가며 실천해야 할 필생의 과업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스스로의 판단과 작위적인 선택에서 벗어나서 매 순간 생명의 근원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의식과 무의식의 통로를 정화함으로써 섭리의 역사를 위한 새로운 공간과 길을 의식적으로 마련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삶은 실천을 통해서 더 깊어지고 넓어지며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 하게 될 것이다.

창세기에서 드러나는 창조의 과정이 바로 이 순간 내 삶의 창조적 과정과 동일한 법칙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더구나 그런 똑같은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창조가 지금 나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고 그래서 내 구미를 당겼다.

게다가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런 의식적인 이해와 사고를 넘어서 가슴에 치유와 평안이 자리 잡으며 머리가 맑아지고 투명해지는 정서적인 감응이 먼저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감응과 함께 내 속에 차오르는 깨달음과 깊은 위안이야말로 진정한 창조와 치유의 과정이 아닐까? 이런 정서적이고 무의식적인 반응이 바로 삶의 근본적인 치유며 새로운 창조 과정이 아닐까?

내가 이곳에서 보았고 체험했던 영적 현상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점차 이해하게 되었다. 내 안의 아버지와 합일이 이루어질 때 소위 말하는 빛의 성전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런 축복된 경험을 원하며, 삶을 새롭게 창조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원한다. 그래서 무의식적인 정서적 충족과 새롭게 일어난 자각과 각성 그리고 치유에 의해서 서서히 본래적 모습을 회복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신에 의한 창조와 재창조, 근원적 힘에 근거한 창조적 과정, 내 삶이 절대적 근원과 힘에 의해서 다시 의미와 가치를 찾아 나갈 수 있고 진정한 삶의 길을 회복해 나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나란 존재는 창조적 기운이 전달되는 통로가 되며 그런 일이 내 삶의 의미가 되고 가치가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늘에서의 창조적 기운인 영의 흐름이 나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이 땅에 말과 행동으로 드러남으로써 우주적 창조와 재창조 과정에 합류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정말 쉽고 상식적인 말이다. 다른 생명체인 나무와 동물들은 이미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나온 자연스러운 돌봄을 통해서 살아가며 자신들의 소임을 다하면 조용히 사라지는 창조적 순환에 합류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천기누설과 같은 엄청난 무엇을 알게 되었고 경험한 것 같지만 다른 한 편에서 보면 너무나 상식적이고 간단하며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천하거나 믿지 않았던 상식을 새롭게 접하고 재 기억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모든 생각의 조각들을 넘어서 가슴의 치유가 일어나며 깊은 이해와 휴식 뒤에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내 삶의 창조적 과정이 나를 어디로 이끌어 나갈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내 삶의 엄청난 방향 전환에도 불구하고 두려움보다는 맑고 편안한 마음으로 재출발하는 기분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이런 과정이 바로 삶의 길, 진정한 생명의 길이 아닐까?

그래, 그렇지. 나를 초월한 우주의 창조적 근원에서 나오는 힘 그것이 나의 근원이며 실체다. 흔히 조물주로 불리는 그 근원적 힘 그것이 나에게 신이며 내가 그 힘과 합일을 이루어 내 속의 신성을 회복하게 되며 신의 일을 이 땅에서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근원과의 합일을 통해서 온전한 질서와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나와 다른 모든 존재가 함께 자기다움을 회복할 때, 생명의 동산을 채워나가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 인간이 결정적 역할을 하기에 인간의 자기 존재의 책임에 대한 각성이 필연적이다.

이런 생각들과 함께 하나의 숙제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어릴 적부터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이상적인 삶의 모델과 존재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 존재는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에 대한 것으로 나다움과 나됨인 바로 나의 본래적 모습이었다. 어느 누구도 나의 이상을 채워줄 수는 없다. 그것은 내가 만든 것이기에, 나만이 스스로 만들고 채워나가야 할 나의 진정한 모습이기에.

그러기에 이런저런 책임회피와 뒤에 숨어서 안이하게 비판만 일삼는 어리석은 행동에서 벗어나서 성숙해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내 삶의 책임을 수용하는 길이다. 그러면서 만들어지는 것이 존재의 진면목이다. 이런 나다움이야말로 내가 이 땅에 온 사명이며 그래서 나만이 이룰 수 있기에 내 삶의 진정한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다른 이웃이나 생명체와 조화를 이루며 창조적 활동을 이어나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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