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그리고

호수

by 최선화


세미나에 참가한 사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보니 대부분이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이었고 남미에서 반정부 운동을 하다 정치적으로 망명한 사람도 여러 명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조국에서 반정부 운동이나 사회운동을 하다 정치적 학대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 온 사람들로, 이곳에서 공부하면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모두의 처지와 한국의 정치적 현실 모두가 다 가슴을 아프게 했다.

식사 시간에 마주 앉은 남자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유명 신문기자로 일하다 경찰에 쫓겨 영국으로 겨우 탈출했다고 한다. 지금은 언젠가 망명에서 풀려나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이미 망명 생활이 3년째인데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며 한숨을 쉬었다. 고향에는 약혼녀와 가족이 기다린다고 했다. 이들은 대부분 사정이 비슷했다. 그들 중에는 망명 생활에 지쳐 아예 이곳 영국에서 결혼해서 정착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는 꼭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사람의 외로움이 작용한 것일까? 이러한 대화가 우리를 가깝게 만들었다.

세미나는 나에게는 직접적인 현실적인 문제는 아니었으나, 한국에서의 상황들과 교차되어 많은 갈등과 분노, 연민을 일으켰다. 내가 한국에서 직면했던 고민이 한국인만의 문제가 아니며, 많은 사람이 함께 고민하는 문제들이었다.

망명객으로서의 생활, 자신들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들, 서로 간의 지지와 연대 등등... 모두가 좋은 얘기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인간의 정치적 해결이 얼마나 소모적이며 지루한지, 인간 군상이 벌이는 군무가 이보다 더 어리석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만 더 했다.

나라면 차라리 휘말려 같이 썩어가는 것보다는, 이 모든 광기와 부패에 저항하기보다는 새로운 씨앗을 심는 일이 더 창조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란을 이미 휘저어버린 것을 다시 돌릴 수 없듯이, 이미 휘저어버린 일을 되돌리려는 노력보다는 새로운 희망을 키우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이 저렇게 지쳐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며 그 원인이 모두 어느 독재자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미친 사람이 돌을 던졌을 때, 어떻게 반응할 지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까움과 분노, 반성과 우정이라는 나눔과 치유가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먼저 런던으로 돌아가는 것을 그는 몹시 아쉬워했다. 그는 아침 일찍 내 방으로 와서 선물을 준비했다며 나를 이끌고 수도원 사잇문을 빠져나왔다. 끝없이 펼쳐진 호밀은 자라서 성인 키보다 더 크고 주변엔 인적조차 없었다.

호밀밭 샛길은 좁았다. 그가 앞서고 내가 뒤따랐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없고 천지는 호밀뿐 아무도 우릴 찾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말없이 앞서갔지만 나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조차 말하지 않고 마냥 가고 있었다. 점점 침묵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여성으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남성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다. 신체적 약자라는 점에서부터 사회, 경제적인 모든 면에서 여자는 약자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는 동물적인 힘에서부터 여성의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측은지심을 자극하는 호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여성은 본능적인 두려움과 불안에 휘말리게 된다. 달리기라도 잘한다면 도망이라도 치겠지만 살아오면서 한 번도 내 뒤에 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자존심을 쉽게 건드려서도 안 되기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심정으로, 단지 아무 일도 없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냥 따라가고 있었다.

몇 번이나 물었다. 어디까지 갈 건지를,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를, 왜 가는지를, 그는 막무가내로 가보면 안다며 앞서 갈 뿐이었다. 영락없는 아프리카인이었다. 이 사람은 내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 짐작조차 못하는 것 같이, 자꾸만 가고 있었다. 이미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고 너무 멀리와 버렸다.

자꾸 뒤처지는 내 앞에 그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소스라치는 나를 보며 환히 어린애같이 웃었지만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겁에 질린 나를 놀리기라도 하는 듯이 그가 싱긋 웃으며 비켜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파란 하늘밖에는. 이상했다, 분명 호밀밭인데 왜 갑자기 천지가 파란지. 두려움에 찬 마음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너무나도 아름다운 호수가 눈앞에 나타났다. 끝없이 펼쳐진 호밀밭 한가운데 박혀있는 아름다운 호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깨끗한 호수에 하늘이 비쳐 모두가 파랗게 보였던 것이다. 주변은 벌들이 윙윙거리는 소리와 만발한 사과꽃과 찔레꽃 향기만 전해질뿐 미동도 없었다.

조물주가 약간 장난을 친 것 같았다. 아니 인간이 만든 것이겠지, 농부들이 필요해서 만든 호수에 생명의 기운이 넘쳐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런 조화로움과 감동, 전날 밤까지 우리 모두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정치적 광기들에 비하면 사람도 이렇게 아름다운 창조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위로와 희망으로 다가왔다.

인간들이 북적대고 아파하며 음모를 꿈꾸는 곳에서 벗어나서, 없는 듯이 숨어있는 조화로움과 질서! 어쩌면 이보다 더한 질서와 조화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질서와 조화가 무엇이든 간에 절대적이고 항거할 수 없는 사랑과 생명의 힘에 대한 찬사가 가슴속에서 흘러넘쳤다.

그래, 인간들 간의 다툼과 놀음만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벌이는 놀음은 마치 손오공이 재주를 부려도 부처님 손 안에서 놀듯이 한낱 장난질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솔로몬의 영광도 한 포기 풀꽃보다 못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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