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천사
어머 이를 어째? 어떡하면 좋아? 숨을 몰아쉬며 역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내가 탈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차를 타야만 했다. 그래야 나에게 장학금을 주던 크리스천 에이드 세미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스케줄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멍하니 한참을 서 있다 다음 열차를 알아보니 2시간 뒤였다. 할 수 없지, 다음 차를 타는 수밖에. 나는 보내준 백지수표로 일단 차표를 끊었다. 그러고서 이 사실을 나를 초대한 장학회에 알리기 위해 전화번호를 찾았다. 어머?!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어떡해? 어떡해? 가방을 다 뒤집어 털어보아도 안내장은 보이질 않았다. 아침에 분명 챙긴 것 같은데... 없었다. 기가 막혔다.
기차도 놓쳐버리고 갈 곳에 대한 안내장도 챙기지 않아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장소 이름도, 연락처도 아무것도 모르니 난감했다. 기가 막혀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 일단 기차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표를 끊었다, 그것도 백지수표로. 백지수표를 보냈다는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의를 의미한다. 그 수표를 쓰고서 가지 않는다는 것은 내 신용의 문제며 일종의 배신행위로 여겨졌다.
브리스톨에 내리면 그때부터 어떡할 것인가? 아무런 정보가 없는데, 어떻게 찾을 것이며 어디로 갈 것인가? 그래도 일단 가보자, 안되면 돌아오지 뭐... 열차시간표를 보니 브리스톨에서 런던으로 오는 기차는 밤늦도록 있었다. 최선을 다한 후에야 내가 할 말이 있지. 정 못 가게 되면 내일이라도 전화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려줘야지.
기차가 브리스톨 역에 서서히 다가가자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어디로 간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내려서 허기를 달래기로 했다. 이를 때일수록 스스로 추슬러야지, 배까지 고프면 지쳐서 안 되지... 역을 빠져나와 둘러보니 작은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식사를 하고 차도 마시며 온갖 여유를 다 부렸다. 그를 수밖에,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시간을 죽이기 위해 가능한 한 천천히 마셨다. 다음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기에, 창밖을 보며 할 일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저리 떠돌던 흩어진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지금 여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 순간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보이는 영역으로 드러나야 할 창조는 무엇인가? 그 창조가 드러나기 위해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후회도, 불안도, 걱정도 아니다. 단지 마음의 중심을 회복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평상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 평상심 속에서 의식에 흐름이 감지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전류가 저항이 적을 때 강하게 흐를 수 있는 것처럼. 나의 의식을 지금, 이 순간으로 집중하고 평상심을 회복하는 데는 호흡이 손쉬운 방법이다. 모든 생각과 감정에서 벗어나서 호흡에만 집중했다.
우연히 튜터의 말이 생각났다. 세미나가 열리는 곳이 원래는 유명한 도자기 회사 갑부의 개인 저택이었는데 그의 유언에 따라 지금은 수도원으로 사용되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그래서 내가 좋아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던 것이 생각났다. 벌떡 일어났다, 이 정도의 정보라면 충분할 것 같았다. 역사를 중시하고 역사적 사실에 익숙한 영국인들은 이 정도라면 어딘지 알 것 같았다.
누구한테 물을 것인가? 일단 경찰서로 가서 사정을 말하면 친절한 영국 경찰이 데려다 줄 지도 모른다. 그래 일단 택시를 타고 경찰서로 데려다 달라고 하자. 갑자기 할 일이 생겨 힘이 나기 시작했다. 역 앞 택시 승강대에는 아직도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런던에서 온 기차가 도착한 지 한참이 지났지만. 나는 맨 뒤에 서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혹시 순찰하는 경찰이 있는지 찾기 위해서. 그러다 내 앞에 서 있는 어떤 노신사와 눈이 마주쳐 의례적인 미소를 보냈다. 다시 이리저리 살피다 또 눈이 마주쳤다. 인상이 좋아서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이 지역에 산 지가 오래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곳이 고향이며 외국에 몇 년 가 있는 일 외는 늘 이곳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갈 곳을 설명하고 혹시 아는지 물었다. 그는 웃으면서 아주 잘 안다고 하며, 자기 집이 바로 그곳에서 멀지 않다고 했다. 지금 그곳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물었다. 기차는 아침, 저녁 두 차례밖에 없고, 버스는 내일 아침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당황해하는 내 모습을 보며 사정을 듣고 나서 그 신사는 자신도 집으로 가는 길이니 본인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선뜻 말했다. 불안해하는 내 표정을 보고서 그는 옆에 함께 있던 할머니를 가리키며 이분이 이모인데 내가 내릴 때까지 동행할 것이라며 안심시켜 주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집안 행사에 조카와 함께 다녀오는 길이라며 자신을 믿고 안심하라고 했다. 인상 좋은 신사분이고, 할머니도 계시고, 별다른 방법도 없고 해서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고마운 마음에 주차장까지 오는 택시비를 내가 지불하고 일단 차에 올랐다. 2시간이 넘게 달려오면서 할머니와 조카는 집안 얘기를 계속했다. 나에게 몇 가지 묻기도 하며 친절을 베풀었다. 할머니가 거의 다 왔다며 오늘은 내가 운이 좋은 날인 것 같다고 했다. 런던에서부터의 사건들을 다 얘기하니 도와줄 수 있어 다행이라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나에게 그날의 수호천사였다. 톨스토이의 어른을 위한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오늘 하루 천사가 찾아올 것이라는 예고를 받았다. 그러나 해가 다해도 천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천사는 거지의 모습으로, 불쌍한 아이의 모습으로, 기다리는 사람이 기대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동화 속 이야기처럼 이 땅에서의 천사는 바로 우리 자신이며 우리를 통해서 천사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미켈란젤로는 천사와 악마의 모델을 찾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천사의 모델이었던 바로 그 사람이 악마의 모델로 뽑혀 이 둘이 동일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샛별인 루시퍼는 원래 가장 빛나는 아름다운 별이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의식과 바른 정체감을 잃음으로써 악마가 된 것이다.
그래, 인간도 원래는 천사지만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을 잃어버림으로써 악마 비슷하게 타락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으로 알기도 한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는 순간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