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혹감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저 꿈 하나만 믿고 따라온 길에서 나는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톰 소여의 모험이나 신디 밧드의 모험처럼 내 인생 최대의 사건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것들을 찾은 것 같았고 내 삶의 의미와 가치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추구와 여행의 막다른 골목에서 나를 버려야 한다는 엄청난 역설 앞에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이제껏 타고 온 배를 버려야 할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이것은 내 삶 전체에 대한 근본적이고 획기적인 전환으로 이제껏 나라고 생각해 온 나를 송두리째 버려야 하는 예기치 못한 자각과 마주한 것이다.
메슬로우의 인간욕구 계층설에도 맨 위 단계는 자아이상과 자아실현이다. 그러나 이런 자아실현은 다시 자아초월로 이어져야 한다고 여겼다. 그렇지 않다면 세속적인 인간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다. 불교에서도 최고의 경지인 지혜를 넘어서 무의 단계로 들어가야 비로소 다른 우주적 존재들과의 연결과 화합이 가능해진다.
그래, 분명 나라는 아상과 자기 작동적 원리에서 벗어나서 초월하는 것은 전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이렇게 머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나라고 여겨온 모든 것을 던져버리는 일은 그리 만만하거나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곳 사람들이 말하는 영성과 근원은 인간의 머리와 이성을 넘어선 초월적 존재의 실체와 그 작용으로 인간을 넘어선 우주적 지성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영적 표현 또는 계시라고 말할 수 있는 초월적 실체를 믿으며 그것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관점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신비롭고 이상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합리적이고 우아하며 사려 깊은 태도이기에 놀랍고 더욱 호기심이 일었다. 마치 예수 시대의 초기 교회 내지는 공동체와 비슷할 것으로 느껴졌다. 하기야 인간이 머리나 이성으로 알고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다가 아니며 삶에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모호하고 불확실한 현상에 기반해서 내 삶이 어떻게 드러나고 내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기독교 학교에 다니다 보니 예배 시간도 있었고 기도하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목사님이나 다른 어른들이 ‘오늘 이 시간을 주님께서 주관해 주시고 성령이 함께하는 축복을 내려주소서’라는 언급이 많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성령이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다. 분명 오늘 모임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주관하는 것인데 어떻게 주님이 주관하며 성령이 함께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이 주로 입발림으로만 들렸었지만, 그래도 내가 모르는 무엇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그 존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더욱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는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도가 존재하는 것은 어렴풋이 알지만, 도가 어떻게 내 삶에서 표현되고 내가 그것에 따라서 살아가는 방법을 알 수 없었던 것과 같았다. 도를 도라고 표현하면 이미 도가 아니라는 말처럼 영성이란 말도 인간의 머리로 붙잡고 언어적 형태로 가둘 수 없는 어떤 살아 움직이는 신묘한 무엇이었다. 그러기에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아직은 내 삶 속에 확고히 자리 잡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는 느끼며 직관과 감성으로 와닿는 무엇이 있었고 그 작용의 결과를 느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것은 스스로의 부족으로 여겼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하늘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처럼 아직은 내 마음이 맑고 투명하지 못한 탓으로 여겼다. 그래, 분명 인간의 작은 머리로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 세계가 존재하며 작은 인간 존재를 넘어선 것이야말로 진정한 초월적 가치를 지닐 것으로 여겨졌다.
인간이라는 이기적 체계 내에서의 머리 굴림은 결국 인간 속성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내가 찾고 싶었던 것은 그러한 한계를 넘어선 근원적인 진리였다. 그래서 찾아 나선 길의 막바지에 도달했다. 그리고 인간의 한계 그 너머의 세계를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라는 아상을 송두리 채 비우고 근원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내 삶의 중심축을 근원으로 확고히 돌려야 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점이 여기까지 따라온 나를 멈추게 하며 당혹스럽게 만든 것이다.
미리 알 수 없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모호함 앞에 누구나 당황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내가 따라오고 경험한 것은 온전히 내 것이며 내 존재 속에 기억되고 각인되어 있다. 그러니 알 수 없음 속에서도 그 길을 따라나서는 것이 바른 선택인 것 같지만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주춤거리게 된다.
어디서 읽었던 구절이 생각났다. 앞에 벽이 가로막혀 있다고 느낄 때는 계속 걸어가라고, 그러면 벽도 물러날 것이라고. 벽에 가로막혀 멈추면 영원히 멈추게 되지만 계속 걸어가면 벽은 물러나다 사라진다고. 마치 어릴 적 무지개를 쫓아가면 더 멀리 사라지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