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환
그들의 표현 중에 나의 큰 관심을 끄는 말은 ‘살아 움직이며 이 땅에 관여하는 신’이라는 표현이었다. 내가 진심으로 알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렇게 이 땅의 삶에 직접 관여하는 살아있는 신에 대한 체험과 믿음이었다.
나에게도 그런 비슷한 체험과 축복이 어느 정도는 주어졌다. 내가 꾼 꿈도 바로 그런 현상 중 하나이고 다른 체험들 소위 말하는 종교적 또는 영적 체험들도 그럴 것이다. 그런 체험들은 내가 머리로만 이해하던 모호한 영성에 대한 믿음과 실체를 스스로 경험하고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지식의 축적을 넘어서 실제 생활 속에서 실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 엄중한 사실 앞에서 막막함과 엄청난 부담감이 밀려왔다. 과연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지나친 요구 아닌가? 내가 아니라면 누가 할 것인가? 엄청난 무엇을 알게 된 것 같고 목격자가 되어버린 것에 대한 희열을 넘어서 부담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니 먼저 이런 과정을 겪은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 주어진 이 순간을 바르게 다루어 나감으로써 더 큰 열림으로 이어질 것으로 믿고 마음 가볍고 즐겁게 생활하고 있기에 안도와 위로가 되었다. 이들이 다른 집단과 확연히 차이 나는 점이 바로 이점으로 단순히 지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서 삶으로 이어지며 생활의 모든 면에서 그런 영성이 표현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서 바로 그런 존재가 되어 말씀과 부합하는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지식 놀음이나 머리 굴림이 아니라 바로 실천하며 그런 존재로 살아감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근원과의 합일을 이루어 신의 창조적 과정에 동참하는 것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태도는 동학에서 말하는 인내천과 통하며 천지인으로 인간은 천지를 잇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하는 존재라는 말과 상통했다. 그런 면에서 약간의 믿음과 체험은 가능했지만 아직은 그 모두를 받아들이며 선뜻 그 길로 나아가기엔 내 속에서 많은 머뭇거림과 두려움이 남아있었고 그 모두를 실천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이쯤에서 내가 그렇게 급한 마음으로 정신없이 따라오던 길을 멈추어 서게 되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는가? 진리와 도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진리를 알게 되면 나 자신이 좀 더 현명한 존재가 될 것이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진정한 깨달음의 경지는 세속적 나를 채워주며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나라는 자아를 버리라 하며, 인간 속성의 한계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도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나의 좁은 머리로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막다른 길에 부딪혀서 작은 세속적 나를 유지하며 돌아서든지 아니면 나라는 껍질을 벗어버리고 탈피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도달한 것이다.
이런 역설적 선택 앞에서 당혹감과 함께 갑자기 모든 것이 헛갈리기 시작했고 과연 내가 본 것들이 실체였는지에 대한 의문마저 들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실체를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해 왔다는 사실과 그들의 존재와 삶이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직접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체험했던 영적 축복과 그 경험들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 더구나 나 자신의 변화와 내 속에서 흐르는 생명수로 이해와 지혜가 솟구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내 가슴에서 온천이 개발된 것 같은 용서와 자비, 따뜻한 이해와 아량이 넘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실체다. 그래, 이게 실체지, 환상이 아니며 내가 마냥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제껏 내 삶은 내 것으로 여겼고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바대로 살아도 된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해서 나 정도의 사람이 함부로 막사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처럼 교육받고 교양과 사회적 책임감을 인식하는 사람은 상식에 근거해서 우아하게 처신하며 약자를 돕고 진리를 탐구하며 사는 것으로 족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다시 돌아보니 교양과 학식이라는 우아한 말로 포장한 이기심과 자만심으로 결국은 나를 앞세우고 나를 더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고 싶은 인간 속성의 다른 단면이라는 점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다.
하늘의 관점에서 본다면 근본적으로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다. 내가 만들지도 구하지도 않았다. 내 생명은 우주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근원으로부터 나왔고 그래서 그 본래적 목적을 위해서 주어졌다. 좁은 나의 알량하고 품위 있는 세속적 목적이 아니라 우주의 창조 목적을 위해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일상의 일들을 처리하는 것도 축적된 지식과 이성적 판단에 따라 계획적이고 합리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런 다짐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충동적이고 감정적이었는지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인간의 세속적 작동원리에서 벗어나서 하늘의 보이지 않는 영역이 보이는 이곳 여기에 드러나게 열려있고 준비되어 있는가? 그런 그릇이나 도구로 살아가기 위해서 지속적인 정화의 과정을 받아들이는가? 자기 작동적 원리에서 벗어나서 우주적 창조라는 근원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기여하고 있는가?라는 온갖 질문들이 내 속에서 피어올랐다.
출애굽기에서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는데도 긴 세월이 걸렸으며 바로 코앞에서조차 허송세월을 보내는 안타까운 장면이 연상되었다. 아! 이게 바로 내 모습이구나! 수천 년 전에 어느 다른 민족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내 이야기가 아닌가? 지금 나에게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뭘 더 증명해야 할 것인가?
인간 속성의 뿌리와 아집이 이리도 뿌리 깊은 것인가? 일생일대의 결단 앞에서 깊은 침묵에 쌓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