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그리고

결단 그리고 새로운 시작

by 최선화


고등학교에서 성경수업과 예배 시간을 통해서 처음으로 접한 성경 말씀과 예수의 이야기를 나는 신화로 여겼다. 그러다 예수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의 말과 행동은 정말 신의 아들다웠다. 그래서 그가 신의 아들이기에 가능했다고 여겼다. 따라서 사람의 자식인 나와는 동떨어진 일로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라는 한 인물의 삶을 통해서 삶에는 내가 경험하는 것과는 다른 더 고매한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비록 신의 아들에게만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말씀을 통해서 드러나는 태도와 말씀은 그때까지 내가 알고 익숙한 도덕이나 규범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사실 집안도 불교이기에, 부처는 사람의 아들로 수양을 통해서 부처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이 나에게 더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것으로 다가왔다.

아무튼 예민한 청소년기에 비록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성경과 예수를 만나게 되었고 전혀 다른 차원인 영적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은 뒤이은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 또다시 초월적 관점에 눈을 뜨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대한민국에서 한국전쟁 직후인 50년대에 태어나서 60-70년대에 성장기를 경험한 소위 말하는 베이비붐 세대들 대부분은 폐허 속에서 삶의 길을 찾아 나선 상황이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돈을 벌어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이었지만 나에게는 눈에 보이는 곳마다 산재해 있는 사회 문제들에 대한 해결 방안들을 찾는 것이었다. 그 시대를 살아온 청년들에게 대한민국의 사회적 환경은 척박했고 정치 상황은 더 절망적이었다.

대학에서는 체류탄 가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회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사회학과 사회사업을 공부했지만, 도대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 깊은 좌절에 빠져 있었다. 그러든 어느 날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이상한 문장 하나를 접하게 되었다.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라질 뿐이다.’ 말도 안 된다며 넘겨버렸다가 다시 그 문장으로 돌아갔다. 뭔가 내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무엇이 있는 것 같았다. 노자의 말씀이기에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날부터 이 문장은 나의 화두가 되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몰두했지만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러든 어느 날 이른 아침 마침내 화두가 풀렸다.

그래, 맞아! 내가 길을 찾고자 하는 방법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었다. 그래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가 사라지는 차원은 뭘까? 어떻게 존재하는 문제가 사라지게 될까? 문제가 만들어진 차원에서 다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접근이다. 문제가 없는 차원에서 볼 때 문제는 사라지게 된다. 이 작은 사건이 나에게는 삶에서 새로운 차원의 해결법을 이해하고 관심을 갖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내가 이제껏 추구하고 따라왔던 방식과는 다른 접근과 차원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서양식 교육과 소위 말하는 이성적 접근방법과는 다른 초월적 방법을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서 불교 선사들의 이야기에 나오는 선문답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 초월적 관점 내지 차원을 제시하는 책들에 관심이 갔다. 그 당시 인도철학과 도인들을 소개하는 책자가 많았다. 거의 모든 책을 다 읽으며 삶에서의 또 다른 관점과 태도를 접하고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도 이런 바탕 덕분에 내가 영국에서 영성 집단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여겨졌던 계기가 된 것 같다.

영성 집단에서 경험한 핵심은 나는 누구인가? 내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었다. 이 모두에 대한 답은 인간은 신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단지 동물 중 하나인 인간일 뿐만 아니라 초월적 특성인 신성과 불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예수님이 신의 아들이라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모범을 보인 사람이었다. 따라서 사람은 이 땅에 매여 사는 환경의 산물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이 땅에 펼치는 존재다. 그 하늘의 뜻은 더 깊이 받아들이고 이해해 나가야겠지만 내가 신성을 가진 존재로 예수만이 신의 아들이 아니라 나도 그리고 모든 생명체가 다 신성을 가진 거룩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과 나에 대한 이런 초월적 정체성은 나의 관점을 모두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인간과 생명이 존엄하기에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 속에 신성이 있고 나는 그 신성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존재라는 관점은 나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 모두에 대한 엄청난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모두 관념적으로 그리고 머리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으로, 일종의 지적 이해와 사고의 폭과 관점을 넓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아니 내 삶에 근본적이고 획기적인 전환이 요구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은 여기까지 따라오고 깨달아 온 나는 여전히 인간 속성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나의 의식과 태도를 지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넓혀온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는 인간 속성의 상태를 유지하고서는 더 나아갈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인 진정한 영성적 차원으로 나아가든지, 아니면 영성에 대한 나름대로의 경험과 이해를 지식으로 간직하며 나를 신비한 영역으로 치장한 채 세속적 존재로 남아있든지, 양자택일의 결단을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 집단의 특성은 영성에 대한 지식과 앎을 넘어서서 바로 영성적 존재가 되며 그 특성을 삶과 실천으로 일상생활에서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나도 단순히 머리로 하는 이해를 넘어서 내 삶 전체에 대한 관점을 통째로 바꾸어야 한다는 자각과 마주친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세속적인 나를 버려야 한다는 깨달음과 선택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어떤 형식적인 변화가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와 관점 그리고 비전과 지향점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더 충실한 내 삶을 살아가며 나의 소명을 다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달라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지만 삶과 세상 그리고 나의 존재와 그 의미와 사명에 대한 안목과 관점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런저런 고민과 망설임 속에서 지내다가 영적 집단에서의 생활과 종교적 체험들은 영성이 단지 신념이나 죽은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실체라는 사실을 깨닫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2000년 전에 죽은 한 사람의 행적과 그 그림자를 붙들고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역사하는 신의 실체를 알고 그 힘과 함께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고 더 가치 있는 일은 없게 된다. 이러한 중대한 선택 앞에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실체에 대한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확신이었다.

내가 이 여행을 시작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던 꿈이 다시 생각났다. 이쯤에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멈추기보다는 분연히 나의 세속적 자아를 벗어던지고 더 큰 자아를 회복하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누에고치에서 벗어나서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탈피의 과정으로 나비로 살아가는 또 다른 여행을 이어갈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생각해 보면 내가 무슨 대단한 일생일대의 선택을 하는 것 같지만 이런 삶이 대단한 것도 아니다. 공중에 나는 새와 눈앞의 저 나무들은 이미 생명이 지어준 대로 꽃 피고 열매 맺는 삶을 자연스럽게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이런 자연적 질서에 순응하는 삶에서 이탈해서 자기 작동적인 아상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인간의 일탈적 행동에서 벗어나서 이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일 뿐이다. 이미 우주가 모두 그렇게 유지되고 있음에도 인간만이 유독 순리에서 벗어나서 헤매다 지금에야 겨우 제 길로 찾아가는 것 아닌가?

이제야 비로소 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며 진정한 나의 소임을 다할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길은 찾는 사람의 것이며 걸어감으로써 새길이 만들어진다. 세속적 자아의 자기 작동적 원리에서 벗어나서 근원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에게는 새로운 여행이 이미 시작되었다.

‘새길을 찾는 사람은 그가 바로 새길이다. 희망찬 사람은 그가 바로 희망이다.’라는 박노해의 시가 생각난다. 길을 찾는 사람은 새길을 만들어가며 희망을 품은 사람은 그가 바로 새 희망을 일구어 나간다. 그럼으로써 새길과 새 희망이 만들어진다. 꿈도 또한 꿈꾸는 사람이 이루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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