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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신성

by 최선화


누구나 다 말은 하지 않지만 자신 속에 온전함과 고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록 지금 드러나는 모습은 다소 초라하고 부족함이 있어 보여도 여전히 존재 안에는 누구도 함부로 평가절하할 수 없는 온전함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나도 어릴 적부터 내 속에 그런 품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우리 어머니나 가족들 속에도 그런 비슷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 속에 그리고 모두 안에 있는 이런 신성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이 우리 삶의 근본이다. 이런 인간이 갖는 신성은 생명을 가진 모든 생명체에 존재하며 이것이 바로 개별화된 신이라 할 수 있다.

내 속에 존재하는 신, 나의 신적인 측면 아니면 내 속에 거하는 하느님, 뭐라고 부르든 간에 이런 특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그런 특성이 우리 삶과 일상 속에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이유며 살아가는 의미가 되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이런 품성을 표현함으로써 창조적 과정에 합류하는 길이 되고 있다.

그런데도 많은 경우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런 본성을 잊어버렸거나 아니면 기억하지 못하고 세상의 풍파에 시달리며 그럭저럭 대충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본질적인 품성은 온전히 남아있기에 한 번씩 기억의 수면으로 떠오르며 우리를 재 기억시켜 주고 있다.

왜 사람들은 잘 살아가다 가도 한 번씩 깊은 허무와 공허감에 빠지는가? 실체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은 어째서 나를 엄습하는가? 진정한 자아와 고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뿌리내리고 살아갈 수 있는 근원과 바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지금 이 땅에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에 왜 그리도 많은 사람이 우울증에 빠져있으며 무의미의 늪을 헤매고 있는가? 여기에 대한 대증요법이 아니라 근본적인 치료는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존재의 실체를 아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어쩌다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라 우주 창조의 일원으로 점지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성경에는 인간의 몸을 신의 성전으로 묘사하고 있다. 개별화된 신이 거하는 곳으로 우리가 그런 신성을 표현하고 드러낼 때 진정한 신의 성전이 될 수 있다. 인간 안에 있는 아름답고 선하며 바른 품성은 어떤 상황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으며 표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거칠고 조악한 표현들은 단지 상처와 아픔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며 지나가는 뜬구름이나 비바람에 불과하며 본질이 아니다.

거친 폭풍우 뒤에 맑은 햇살이 드러나는 것과 같이 우리 속에 잘 보존된 본성인 신성을 드러내고 표현함으로써 상처와 어둠은 걷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웃들이 보여주는 흉한 모습들은 구원의 손길을 원하는 외침이며 그들이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자 하는 절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은 우리 개개인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며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우리 속의 신적인 품성을 표현하고 그 특성을 드러내는 삶을 자연스럽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모두 속에 존재하는 신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대한다면 우리의 일상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질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은 이런 존재의 출현과 고결한 표현에 목말라 있다. 누가 이런 세상의 목마름을 채워주고 응답할 것인가? 언제 어디서나 선함과 진실한 모습이 드러나면 누구나 쉽게 알아차리게 되며 그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 세상은 그런 표현을 기다리며 그런 사람을 찾고 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으로 응답해야 한다.



우주 창조의 근원인 거대한 신만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우리 속에 개별화된 이런 신성이 존재하기에 근원적인 신과 서로 만날 수 있는 접점이 되고, 나라는 작은 개체를 벗어나서 더 큰 우주라는 자아로 확장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런 내 속에 있는 신성을 양심 또는 자아 이상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인간의 신적인 측면은 이런 개념들을 넘어서서 훨씬 더 근본적이고 확장된 존재로 생명의 근원과 맞닿아있다.

이런 신성 속에는 스스로 제어해 나갈 수 있는 힘과 섭리가 함께 한다. 이런 섭리와 자기 조절을 통해서 작은 나라는 개체에서 벗어나서 더 큰 자아로 확장될 수 있으며 생명과 본성에 대한 이해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소통과 교류를 통해서 더욱 확대된 신적인 표현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바로 나 자신의 매일의 매 순간들을 신성의 표현으로 채워나가고 정화해 나감으로써 더 큰 연결이 가능해질 것이다.

주어지는 매 순간에 깨어있음으로써 적절한 표현을 통해서 우리의 본성을 드러낼 수 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표현이 교회나 사찰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잣거리와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한다. 도와 신성은 혼자서 알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표현됨으로써 선한 영향력이 전달되고 퍼져나갈 때 세상 모두가 함께 밝아지고 맑아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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