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등학교의 한 교실에 두 학생이 있었다. 두 사람은 말은 하지 않지만, 서로를 알고 둘 간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다른 학생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지만 한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은 숨겨져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한 채 성장했다. 그러다 운명의 장난처럼 자부심 강한 명문 고등학교의 한 교실에서 마주친 것이다.
모든 생명은 축복 속에서 태어나며 생명을 얻은 것 자체가 큰 축복이다. 그러나 여기에 사회제도와 법 그리고 인간관계라는 인위적 규율이 더해지면 전혀 다른 사회적 존재가 된다. 합법적으로 태어났는가? 사회와 가족의 승인하에 이루어진 관계인가에 따라 축복받지 못하는 생명도 있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도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때와 비슷하게 그늘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으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죄가 있다면 어른들의 잘못인데 그 죄 아닌 죄 값을 무고한 새 생명이 지고 살며 사회는 이들을 비난하고 딱지를 붙인다. 그러다 보니 이들의 삶이 순탄치 못한 경우가 많다. 홍길동처럼 그런 신분에 저항하며 분연히 일어나 자신의 삶을 새롭게 개척해 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멀리 이민을 가버리기도 하고 아니면 출세하거나 돈 많이 벌어서 보란 듯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그러지도 못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개인적 무능만을 탓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다. 아니면 주변 상황이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린 면도 있다. 어쨌건 이들의 존재는 본인뿐만 아니라 그들과 엮어진 모두에게 상처가 되고 그늘이 되며 그들 가족만의 비밀 아닌 비밀이 되어 고질병처럼 모두가 서서히 앓는 속병을 지니고도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이 살아간다.
요즘에 들어서는 복합 가족이 늘어나다 보니, 이런 유형만이 아니라 한 가족 안에서 콩쥐와 팥쥐 비슷한 관계가 늘어나고 있다. 아니면 같은 부모 밑에서 성장하지만, 장애나 생김새 아니면 성격적인 이유 등으로 전혀 다른 대접과 차별을 받으며 성장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긴 세월을 살다 보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래서 어른들은 자고로 어린 거지는 박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3대 가는 부자 없고, 3대 가는 거지 없다는 말도 있다. 세월을 통해서 배운 삶의 교훈들이다. 그렇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서로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친절하고 예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먼 훗날을 생각하며 화를 피하기 위한 계산적인 행동이기보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과 생명에 대한 기본 도리며 나의 인격이고 품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르는 남도 돕고 사는 세상에 그래도 피를 나눈 사람이 더 낫지 않을까? 남보다 못한 형제고 가족이라지만 과연 그럴까? 긴 세월을 살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특히, 지금과 같이 사회적 변동이 심할 때는 살아가는 동안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른다. 상전벽해가 되고 양지가 음지가 되기도 한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듯이 가장 미워하며 구박하고 내친 사람이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이 애타게 그리워하며 찾던 친딸로 밝혀지는 경우도 많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웬수 아닌 웬수로 여긴 사람이 나중에 은인이 되어 생명을 구해주는 일도 많다. 자고로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법이다.
양지에서 자란 사람이 겉으로는 아닌 것 같지만 은근히 존재 자체를 무시하고 탐탁지 않게 여기던 음지에게 도움을 절실하게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그래도 어려운 얘기를 하기엔 남들보다 낫고, 형편을 이해할 수 있기에 다른 사람이 아닌 그들을 찾아갈 것이다. 그랬을 때, 사람이라면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을 것이고 보란 듯이 내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경우 넓은 마음으로 기꺼이 도움을 주며 마침내 서로 간에 화해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힘의 역전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 등 복잡한 마음이 교차해서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양지 또한 그런 음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다시금 새로운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렇게 살다 보면 인간관계에서 언젠가는 풀어버려야만 하는 숙제들이 있으며, 잊고 지내다가도 다시 나타나서 해결을 요구한다. 그래서 숨겨둔 비밀의 뚜껑이 열리게 되어 벽장 속 깊숙이 숨겨둔 해골을 꺼내서 처리하게 된다. 그래서 모두가 그동안의 짐과 무게에서 벗어나 마침내 서로의 존재가 결국은 축복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삶은 이렇게 우리 모두에게 많은 기회를 부여하며 삶의 법칙인 사랑과 자비를 깨달을 수 있도록 인내와 너그러움을 제공한다. 그런 삶에 무한한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