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아니면 마지막이라고 느끼는 순간과 마주하는 것은 언제나 어느 만큼의 슬픔과 강한 정서적 혼란과 혼돈을 동반한다. 상황은 모두 다르다 할지라도 살다 보면 이런 순간과 부닥쳐야 하는 때가 오고야 만다. 연인과의 이별 같은 로맨틱한 순간도 있고 오랜 친구와의 결별 같은 먹먹한 순간도 있다. 아끼고 소중히 여기던 물건과의 이별도 그렇게 쉽고 가볍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뭐라 해도 가족과의 마지막 순간은 부정하고 싶은 현실로 다가오며 아무리 준비하고 예견된 일이라 해도 언제나 낯설고 서투르며 당황스럽다. 어머니를 병원으로 모시고 남겨진 세간살이들을 정리하는 마음도 그랬고, 20년 넘게 사용하던 연구실을 비우고 돌아서면서도 그랬다. 분명 새집으로 이사 가며 자부심과 기쁨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헌신짝 버리듯 떠나던 마음과는 사뭇 달랐다.
한 시기의 끝은 다음을 예측하고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다음에 대한 기대나 설렘보다는 그 자체로 종말이며 기대할 다음이 암울하거나 없는 경우, 그야말로 종착지를 향해서 떠나보내는 마음은 외롭고 쓸쓸하며 허망하기만 하다. 어머니를 보내고 남겨진 물건들을 보니 물건조차 빛을 잃고 쓰레기가 되었다. 한때는 귀하고 소중했던 것들이지만 타인의 눈에는 그냥 치워버려야 할 폐품에 지나지 않았다. 먼지를 털며 아끼고 소중히 다룬 것들이지만 주인 없는 물건은 이미 주인과 함께 수명을 다한 것 같았다. 공산품과 기호품 등 누구나 필요하고 요긴한 생활용품조차도, 멀쩡하게 유명 제품이라는 상표가 그대로 붙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 잃은 버려진 것들로, 누군가 눈길을 주고 알아봐 주는 것에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버려진다는 것, 잊어버린다는 것은 이렇게 모든 가치와 의미를 박탈해버리는 잔인한 일이다.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알아줄 때만이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된다. 사람만이 아니라 소유물조차도, 박제된 모형이 아니라 생기를 지니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손길과 온기를 요구한다.
어머니를 보내고 다시 이번에는 언니를 병원으로 보내고 뒷정리를 하면서 다음은 내 차례려니 하는 마음과 얼마 남지 않았을 것 같은 나의 뒷모습 같아 더 마음이 무거웠다. 내 뒤를 정리할 사람의 수고를 생각해서 가능한 한 다 비우고 쓰레기는 남기지 말고, 쓸만한 것들을 찾아가는 쏠쏠한 재미와 기쁨을 누리도록 하자. 나와 함께 빛을 잃어버릴 물건들은 미리 나누고 주인을 찾아주어 생기를 이어가도록 하자는 쓸쓸한 결심으로 마음을 다잡아 보고 이런저런 다짐을 다 해 보지만 허망하고 무거운 마음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육체라는 무겁고 낡은 옷은 언젠가는 벗어던져야 하고 그럼으로써 해탈해야 한다. 그러니 종말이 아니라 자유를 찾아 떠나는 해방이라고 스스로 위로하지만 그래도 눈길 닳는 것마다 친숙한 모습과 체온이 느껴지며 뜨거움이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것 또한 이별을 위한 의식으로 망각의 늪으로 흘려보내며 새로움이 돋아나기 위한 진혼곡 이리라.
산책은 언제나 나에게 최고의 동반자며 치유 수단이다. 떨어진 나뭇잎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하염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파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나목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파리들이 다 떨어진 나목의 외로움과 의연함이 오늘따라 어쩜 이라도 가깝게 느껴지고 위로가 되는지...
우리는 모두 생명나무의 이파리들로 때가 되면 떨어져서 바스락거리며 사그라지고 그래서 다른 생명을 소생시키는 밑거름이 된다. 바로 그런 힘으로 우리라는 존재가 태어났고 자라서 순환하며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엄연한 질서 앞에 엄살을 부리며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다.
그래도, 가슴에 느껴지는 슬픔이야 개인의 몫이지만 그 나머지는 당연한 생명의 순환일 뿐이다. 이런 자연스러운 질서 앞에 당혹하고 초연하지 못한 것은, 나만이 치러야 하고 갚아야 할 관계라는 부채와 정서적 얽힘과 무게 때문이다. 그러니 조용히 내 몫의 애도와 참회라는 숙제를 묵묵히 해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오늘에 감사하며 언제라도 홀연히 떠날 수 있게 차분히 내 몫의 삶을 살아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