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여행

by 최선화


퇴직하고부터는 내 삶이 참 단순해지고 여유로워졌다. 머리 아파하며 해결해야 할 숙제가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라고는 설거지와 청소밖에 없는데도 습관적으로 뭔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증이 불현듯 찾아들었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참 바쁘게 살았다. 초등학교부터 밤늦게까지 잠을 쫓아가며 공부했고 취업해서는 논문과 수업에 대한 부담으로 마음 편하게 쉰 적이 없다. 늘 쫓기듯이 살았고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그런 몸에 밴 습관이 이렇게 할 일 없이 지내는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듯이, 뭔가를 다시 해야 한다고 은근히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의식적으로 이런 관성의 법칙과 세상의 유혹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될 것이라고 다짐한다. 내 삶의 주기로 볼 때 그렇게 사는 것은 이미 한 단락 정리되었고 이제는 여유와 단순함 속에서 다른 삶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여긴다.


그 다른 것이 무엇인가? 배우고 익히며 실천하는 단계는, 형식상으로 볼 때 이미 끝났기에 이제는 그런 외적이고 사회적인 삶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존재론적 삶을 지향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외적인 사회적 관계보다는 내적이며 나와 내 존재를 만든 근원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그런 속에서 삶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진작 그것이 무엇인지는 살아가면서 탐색하고 발견하며 익히고 확장해 나가게 될 것이다.

그래도 어렴풋이 짐작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내적으로 차분히 들여다보고 갈고닦으며 단순한 앎과 배움에서 나아가서 지식이 체화되어 존재로서 드러나는 삶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사회적 관계가 줄어든 대신 내 마음 밭에 존재의 의미를 더하는 진정한 삶의 표현으로 채워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이미지가 하나 떠오른다. 그것은 산속 깊은 곳에서 나이 많은 도인이 차를 마시며 지내고, 바위에 앉아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참선하는 모습이다. 어릴 적 그런 신선도라는 그림을 볼 때마다 참 궁금했었다. 저 노인이 산속에 저렇게 홀로 유유자적하게 지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길래 저렇게 사는지, 왜 도인은 저렇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는지가. 아무에게도 차마 물어보진 못해도 마음속으로는 정말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 바로 내가 산속이 아닌 빌딩 숲 속에 차 대신 커피를 마시며 언덕에 올라 세상과 바다를 바라보며 한가롭게 지내고 있다. 비록 큰 지팡이는 없지만, 흰머리는 비슷하다. 이런 겉모습보다는 그 한가로움이 세상의 분주함과 번잡함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하며, 유유자적함은 이제야 내면의 고요와 평온을 회복하고 세상과 삶을 관조하며 진정한 존재적 차원으로서의 삶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런 존재가 가지는 삶의 의미는 도(道)인 길을 찾고 누리는 것이며 진정한 삶의 길, 존재의 길을 드러내는 것이라 여겨진다.

참삶의 길은 시끄러운 저잣거리보다는 조용한 자연에서 더 잘 보일 것이며 마음의 여유로움으로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니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초라함에서 달아나기 위해서 모이고 왁자지껄하게 지내며 삶을 죽여나갈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고독과 더불어 진정한 삶의 길을 찾고 누리는 길을 택할 것이다.


삶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생명의 근원인 신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나의 출발점이며 종착지이기에. 더 나아가서 그런 근원과 생명이 나에게 부여한 소명이 무엇이며 우주적 질서라는 의미에서의 세계관과 인생관 더 나아가서는 우주관에 대한 깊은 성찰이 요구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세속적인 책임과 임무에서 벗어나서 이제야 진정한 삶을 살기 시작한 것 같고, 진정한 공부가 다시 시작된 것 같다. 이렇게 참나를 찾아가는 새로운 여행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지금까지의 삶은 바로 이 지점으로 오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생각마저 들며, 여기까지 길을 찾아올 수 있었던 행운에 깊이 감사드린다. 나의 새로운 여행에 행운이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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