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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선화 Nov 17. 2022

빛의 성전에 이르는 일곱 계단

깨달음

깨달음     

깨달음은 사람의 영적 표현의 특성과 관련된다. 깨달음 속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것, 있는 것을 알고 인식하게 된다. 깨달음 속에서 축복받은 자는 아무것도 원하거나 바라지 않으며 완벽하게 모든 것을 놓아버리며 벗어난다. 축복받은 자는 어떤 보상을 바라고 추구하거나 노력하며 기어오르지 않는다. 항상 존재하는 것과 함께하며 내적 충동에 따라서 순수한 사랑의 응답으로 모든 것을 행한다.     

축복받은 자는 완벽한 계획을 위한 모든 것이 미세한 부분까지 이미 주어졌다는 것을 안다. 깨달음은 내면에 거하는 경이로운 이의 현존에 대한 절대적 인식이다. 깨달음은 현존 속에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진리를 드러낸다. 현존에 대한 깨달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며 깨달음은 절대적 확신으로 이어진다.


‘고요하라, 그리고 내가 신임을 알라’는 말씀의 영을 따르는 축복받은 자는 내 안에 거하는 경이로운 이를 통해서 깨달음이 확장되는 것을 안다. 안에 계신 이를 유일한 근원으로 의지하며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서 범사에 감사하며 그럼으로써 모든 생각과 행동에 사랑이 배어난다. 

그가 확신을 경험하는 자로 빛나게 되며 그 결과로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며 안에 계신 경이로운 이와 하나 된 자로 응답하는 자가 존재하는 이가 되며 그를 보낸 스스로 존재하는 이의 우주적 계획에서 바른 위치와 기능을 깨닫게 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깨달음이란 어떤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는 것 등의 지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앎이나 자각을 의미한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에서의 깨달음은 막혔던 생각이나 태도가 한순간 화두가 풀리듯 깨치면서, 전혀 다른 수준으로 나아가는 초월적 경험을 의미한다.      

 사람에게는 지적이고 감성적인 능력 외에도 영적 능력이 존재하며 초자연현상이나 초월적 현상을 느끼고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하지만 활성화되지 못한 면이 있다. 그러한 능력은 우리가 가끔 알 수 없는 어떤 삶의 충동을 느끼거나, 우연 같은 필연으로 적절한 장소와 적절한 시간에 마주치는 기적 같은 경험으로 드러난다.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은 초월적 경험이 깨달음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빛의 성전에 이르기 위한 깨달음은, 지적 수준에서의 자각이나 눈뜸을 넘어서 영적 수준에서의 영적 표현과 관련된다. 영적 표현에서 가장 기본적인 깨달음은 현존 또는 경이로운 이의 존재를 인식하고 알게 되며 이해함으로써 영적 표현에 합류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내 안에 거하는 현존과 하나 되는 것이다. 영적 표현은 현존이 우리라는 도구를 통해서 드러남으로써 알게 되며 아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인간의 지적 능력은 인간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결정하고 인내하며 노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하는 거룩한 이가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드러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현존과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경이로운 이는 초월적 특성을 가졌기에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 감지하거나 설명할 수 없으며, 초월적 경험과 앎을 통해서 깨달음으로 다가와서 더 깊은 경험을 통해 확신으로 나아간다. 

 영적 표현은 말이나 머리로 설명하기 힘들며, 스스로 영적 표현을 하고 영적 표현에 참여함으로써 알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표현하며 표현을 통해서 더 깊이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영적 표현도 참여하고 동참함으로써 더 깊이 알아가게 된다. 



                    

 어릴 적 농촌에서 자라다 보니 자연을 보고 관찰하는 일이 많았다. 이런 습관은 할아버지가 아침저녁으로 마당에 서서 뒷짐을 지고서 바람 방향을 살피고 공기를 느끼며 새나 개미들을 관찰하시며 다음 날 날씨를 예측하는 것을 보면서 자란 덕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농사를 짓던 할아버지의 현실적 필요와는 달리 나는 나에게 흥미로운 것들에 더 관심이 갔다.     

 새싹이 어떻게 때를 알고 고개를 내미는지, 언제 꽃이 피어야 하는지를 어떻게 알고 피며 열매 맺는지, 새는 어떻게 먹이를 찾고 어디서 잠을 자는지, 장마 뒤에는 잠자리가 어디 있다 갑자기 나타나는지 등등 아이다운 호기심과 의문이 들었다.

 엄마는 스스로 다 알아서 한다고 했지만 어떻게 알아서 하는지 여전히 의문이 들었고, 오빠에게 물으면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며 그런 일은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며 면박을 주었다. 학교에서는 자연 시간에 여러 가지 자연현상들에 대해서 배웠지만, 전혀 나의 호기심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러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걱정하지 말라...’는 성경 구절을 읽었을 때야 비로소 의문들이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가 말한 ‘스스로 다 알아서 한다’는 말과 생명 자체에 내재된 생체시계와 의식이 조물주나 창조주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드는 의문은 ‘그러면 사람은?’이었다. 자연의 일부인 사람에게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왜 사람들은 다른 식물이나 동물과는 달리 온갖 사회적 법칙과 규율에 따라 살아가며 인간관계 속에 뒤엉켜서 사는가? 그러면 사회에서 벗어나서 자연으로 회귀해야 하는가? 나 같은 겁쟁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그러기보다는 생명 자체에 내재되어 이미 장착된 자연의 법칙대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 자연법칙을 무슨 말로 어떻게 표현한다 해도 근본은 같은 것이다.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땀 흘리며 노력해서 만들어 갈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존재하는 길라잡이를 따라서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솔로몬의 영광도 풀꽃보다 못하다는 구절을 읽고서 더 굳어지게 되었다.

 이미 생명을 통해서 작동하고 있는 우주적 작동원리와 법칙이 사람에게만 예외일 수 없으며 그렇게 우주적 원칙에서 벗어났기에 세상에 혼란이 온 것이 아닌가? 모두가 자연의 질서로 돌아가서 생명의 법칙에 순응한다면 본래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단순하고 소박한 태도가 종교에서는 온갖 비유와 상징 아니면 복잡한 또 다른 말이나 주장들로 채워지며 덧칠을 하다 보니 본질은 묻어지고 어렵게 느껴지며 거리감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처럼 소박한 생각으로 단순화시켜 보면 좀 더 본질이 쉽게 드러나는 것 같다. 생명 자체의 원리로 더 크게는 우주의 창조 원칙대로 돌아가는 것이 애초에 조물주가 인간을 만든 이유가 아닐까?   

  

 갓 난 쟁이는 때가 되면 기고 그러다 일어나서 걷는다. 누구도 아이를 강제로 일으킬 수도 걸음마를 가르칠 수도 없다. 스스로 때가 되어야 하며, 생명의 법칙에 따라서 스스로 자라난다. 이런 아이도 성장하면서 자의식이 생겨서 점차 ‘나’라는 자기의식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병이 나면 의사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생명 활동에 따라 치유되며 의사와 약은 단지 보조제에 불과할 뿐이다. 이처럼 본질에서 벗어나서, 아버지의 집에서 나온 탕아처럼 떠도는 인간의 치유, 인간 삶의 치유는 조물주 또는 창조주의 창조 원리대로 생명의 법칙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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