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에게 사과를

by 최선화

민들레에게 사과를


길 가 어디서나 봄이 아니어도 흔히 볼 수 있는 민들레지만, 민들레를 보고 반가움에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20대에, 캐나다 북쪽 거의 끝에서 한겨울을 보낸 때가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상록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무채색이었고 눈은 담벼락보다 더 높이 쌓여 있는 겨울왕국이었다. 엄청난 추위 속에 그야말로 동면을 하고서 5월이 되어 밴쿠버로 내려오다 먼 곳에서 노란색의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해 처음으로 색이 있는 존재를 만난 것이다.

차를 세우고 가까이 가서 보니 민들레였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친숙하고 반가운 고향 친구를 만난 것 같았고, 사람을 만난 것 이상으로 민들레가 반가웠다. 그렇게 흔한 민들레가 어쩜 그리도 귀하고 사랑스러웠던지...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이미륵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망명한 독일에서, 이웃집 마당에 피어있던 꽈리를 보고서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젖었던 것처럼...

이렇게 흔하고 발에 밟히는 존재도 때와 장소에 따라 귀하고 반가운 존재가 된다. 그러니 어떤 존재 자체가 귀하고 천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내가 귀하게, 아니면 하찮게 보는 것이다. 내 눈이 귀함을 알아차릴 줄 알면 귀한 것이 되고 그 가치를 모르면 나에게는 의미가 없게 된다. 이런 면에서 많은 것들을 반성하게 된다. 특히 우리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더 귀히 여기지 못한 것과 내 삶의 과정에 스쳐 간 모두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알아채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내 불찰이다. 그런데도 똑같은 어리석음과 까막눈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렇게 많은 민들레와 함께 살아왔지만 먹을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그냥 눈으로 보고 즐기면 그만인 것으로 여겼고 발에 밟히는 것을 입으로 가져간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 했었다. 그런데 미국에 있을 때 어느 날 친구가 차를 대접했다. 딱 나에게 맞는 차여서 뭔지 물었더니 민들레로 만든 커피라고 했다. 민들레 뿌리를 볶아서 차로 만들면 약간 쓴맛과 구수한 맛이 커피와 비슷해서 민들레 커피(dandelion kaffee)라고 한다. 서양의 기름지고 무거운 음식에 지친 나에게 민들레 커피는 최고의 차로 차 이상의 치료제였다.

어머나 세상에! 내가 또 뭘 몰랐네! 춘궁기에 민들레 쌈을 먹는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있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민들레가 얼마나 몸에 좋으며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는 알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다 비싼 돈을 지불하고 있었으니... 나의 무지와 근시안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놓치고 그 가치를 모르고 흘려버린 것이 어디 민들레뿐이겠는가?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다. 눈을 가진 자에게는 보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엄청나게 비싼 조선백자 사발을 개밥그릇으로 사용하는 무지렁이처럼. 지금은 민들레의 효능이 알려져 민들레가 수난을 겪고 있다. 그러나 몸에 좋은 것이 어디 민들레뿐이랴!

자연을 인간의 착취 대상으로만 대하는 것은 무지를 넘어 불경스러운 일이다. 자연을 내 놀잇감으로만 여기는 태도 또한 어리석다. 벌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제일 먼저 찾는 것이 민들레꽃으로 벌에게는 가장 중요한 먹이로 초유와 같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꽃을 함부로 채취해서 벌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벌이 살지 못하는 곳에서는 사람도 살지 못한다. 벌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풀꽃 하나도 고유한 위상과 역할이 있으며 그런 생명체가 사라지면 그만큼 인간의 삶도 위협받게 된다.

흔하디 흔한 민들레도 사랑받기 충분하다. 사람의 좁은 식견으로는 다 알지도 못하고, 따지기 전에 그냥 지구별에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로 이웃이나 동반자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나에게 민들레는 오랜 친구 같은 친근함과 새 희망의 상징으로 언제나 반갑고 귀하지만 어디 그렇지 않은 생명과 존재가 있으랴!

하얀 홀씨가 비누 방울 같이 둥글게 모여있는 모습은 어느 작가의 은세공 작품보다 더 섬세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예술품이다. 민들레 홀씨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 마치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는 우리 학생들 같기도 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싶어 하는 내 모습 같기도 하다. 세상에 이유 없이 존재하는 생명체는 없다, 단지 우리가 미처 그 가치를 알아내지 못했을 뿐이며 다 알 수도 없다. 그러니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존중해야 마땅하다. 그 모두가 신의 작품이며 걸작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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