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더 글로리》파트 1
네가 나 때렸어. 분명히.
유학생활을 함께 한 친구가 있다. 같이 유학생활을 한 동기였기에 친하게 지냈다. 그 친구는 누군가의 스펙에 관심이 많았다. 누가 한국의 어느 동네에서 어느 초중고를 나왔고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부모는 어떤 일을 하는지. 호구 조사랄까? 20대인데도 그런 점에 관심이 많아 그런 줄 알았다.
좋게 말하면 당돌하고 나쁘게 말하면 속물이랄까? 사람을 어떤 육질을 가졌는지 등급을 나누는 듯했다. 그때는 어릴 때라 그렇게 행동하는 그에 대해 옳고 나쁘다는 생각을 크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더욱이 나와 맞는 친구를 골라 사귈 만큼 선택권도 많지 않았다.
그래도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한 우리라 각별한 점은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어릴 적 당시의 일을 끊임없이 곱씹으며 과거의 우리를 회상하곤 했다. 각자 직업을 갖고 서로가 바쁠 때쯤에도 그 친구는 동기들을 찾아 나섰다. 모두가 직장인이 되었을 때도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었는데, 자신이 회사에서 얼마나 힘든지 상사가 얼마나 미친놈인지에 대해 대화의 99프로를 차지했다. 집으로 돌아갈 땐 그 친구의 생활이 녹록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어느 날 무언가 터졌다. 분명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그는 화풀이를 나에게 하고야 말았다.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말을 자주 하던 그는 자신만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내뱉는 걸 스스럼없이 했었는데, 대화가 이어지더니 공격으로 변했다. 그 친구의 이야기만 듣다 나도 내가 돈벌이를 하는 대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거기 사람들은 왜 돈 받고 있냐며, 자기는 대학 다닐 때 도움받은 적이 하나도 없다고. 다 잘라 버려야 한다며 울분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분출에 당황했달까? 아님 이런 순간이 올 줄 알았달까? 끊임없이 나의 직업과 회사에 대한 비난이 이어지더니 내가 꿈쩍도 하지 않자 갑자기 재미가 없다는 듯이 자기 회사이야기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학 때도 배려가 깊지 않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차가 없는 그를 픽업 가면 30분이 넘게 연락도 하지 않고 내려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30분 후에 전화를 하며 나타나, 내가 기사라도 되는 듯 차에 탔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이었다.
어릴 때는 친구가 없는 게 두려웠달까? 그래도 걔 사정이 있겠지? 라 이해하려 노력했달까? 그런 사소한 사건들이 쌓이고 또 이어질 때쯤 내 밥벌이에 대해 하찮게 얘기하는 그와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선민사상으로 가득한 발언을 했을 때 이 친구와의 인연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네가 나 말로 때렸어. 분명히.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 가난해서 모진 학교 폭력을 당한 문동은(송혜교). 10대의 웃음기는 얼굴에 없었고 학교로 향하면 아무도 그녀의 편이 없었다. 지켜줘야 할 담임 선생님조차. 그래서 죽으러 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 안개가 눈앞에서 시야를 가렸다. 새하얀 눈 속에 흉을 지워버려 했지만 더 가려울 뿐이었다. 울면서 다짐한다. 왜 나만 죽어야 하는 거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여기까지 오는 데 우연은 단 한 줄도 없었어.
"넌 꿈이 뭔데?", "너. 오늘부터 내 꿈은 너야. 우리 꼭 또 보자. 박연진(임지연)." 누군가에 대한 복수극을 꿈으로 삼은 주인공. 애틋하고 안타깝다. 단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고, 또 잊지 않다 보니 증오가 되어서 그리움이 되었다. 어린 시절, 누구도 방패막이되지 못했던 청소년에게 그저 남은 건 두려움이었고 또 괴로움이었다. 어딜 가도 안전한 곳이 없었달까? 내가 느낀 두려움을 네가 온전히 느끼게끔 하는 게 나의 꿈이라고.
치밀한 복수에 무릎을 꿇는 공범도 있다. 궁지에 몰리니 쏟아져 나오는 한마디. "그때 우리 다 너무 어렸잖아. 실수하면서 크는 거잖아." 실수라기에 누군가의 몸에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남았고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실수라고 치부하기엔 우연은 하나도 남지 않았던 것이다.
태어나서 보니 세상은 이미 연진의 편이다. 끔찍한 학교폭력을 저지르고도 내가 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연진. 반성은커녕 그때 죽이지 못해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협박받고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잘난 남편을 만나 소중한 딸까지 낳고 행복하게 사는 그녀는 자신을 조여 오는 목줄을 가진 남편에게 판도라의 상자는 열지 말라고 협박까지 한다. 우린 이렇게 멋지고 잘 사는 행복한 트로피 부부니깐.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주여정(이도현)은 악몽 같은 사건을 겪은 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가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어릴 때 눈앞에서 똑똑히 봤기 때문이다. 살인자는 감옥에 들어가고, 지속적으로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네 아버지를 죽인 방법을 상세히 서술하며 말이다. 감옥에 갇혀있다고 생각이 갇힌 건 아니다. 사이코패스는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자신의 행동과 말을 정당화한다. 반성은 추호에도 없으며 자기가 내뱉은 말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더 글로리는 '영광'이란 뜻이다. 학교 폭력 피해자들이 바란 것은 현실적이고 금전적인 보상이 아니라 가해자들의 진심 어린 사과와 잃어버린 명예, 또 영광을 찾는 것이라고. 1995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일급 살인》이 떠오른다. 1938년 한 남자가 단돈 5달러를 훔친 죄명으로 지하감방에서 3년 동안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게 된다. 변호를 맡은 젊은 관선 변호사 제임스에게 오히려 죄수가 묻는다. 당신은 5달러를 훔쳐본 적 있느냐고. 그리고 어떻게 되었냐고. 변호사의 대답은 간단했다. 형의 지갑에서 5달러를 훔쳤고, 다신 그러지 말라고 훈계를 받았다고.
같은 일을 저질러도 누군가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을 수 있고, 누군가에겐 그저 별일 아닌 것으로 넘어갈 수 있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연진에게 삐딱한 누군가가 고데기와 다리미로 지져도 그 집안이 가만있었을까?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가해자를 매장시키기 위해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 그의 인생 전부를, 아니 그 가족의 인생을 모두 망가뜨릴 것이다. 드라마를 보며 화가 나는 이유는 아마 유전무죄 무전유죄, 즉 사회적 계급에 따라 다른 처벌이다. 무전이 죄라면 그녀의 처절한 복수가 무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