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감자
나란 사람은 간사해서 직장을 구직하지 못할 때의 간절한 마음이 구직 이후 퇴근과 결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대체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어제부터 무릎이 쑤셔서 곧 비가 올 것임을 직감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다. 천장이 뻥 뚫린 막노동 특성상 비가 오는 날은 강제로 쉬어야 하는데 관리직이 아니라 현장직인 내 입장에서는 내리는 비가 여간 반가울 수 없다. 한 푼이 아쉽고 건강한 분들이야 내리는 비에 속이 타겠지만 말이다.
오늘도 안전장화를 신고 물이 고인 도랑을 뛰어다녔다. 너무 열심히 하려던 탈이었을까. 깊은 물웅덩이에 풍덩 빠져 긴 장화 속으로 물이 다 스며들었다. 찝찝함은 뒷전이고 일단 발가락이 시렸지만, 젊은 사람이 드문 공사현장이기도 하고 내색하지 않고 눈치껏 열심히 일했다. 솔직히 나는 일을 잘 못하지만, 오늘 마치면서 반장님들께 칭찬을 받았다. "이 친구는 싹싹하고 예의 바르네." 나로서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수험생활을 하면서는 받아보지 못한 칭찬이었고, 일을 시작하면서 부쩍 내려갔던 자존감이 +1 되는 느낌이었다.
막노동은 정신 수양의 과정이다. 파이프를 어깨에 짊어지고 옮기면 잡념이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진다. 입으로 내뱉는 거친 숨을 따라 몸속의 나쁜 기운이 빠져나가고 들숨으로 인생의 참맛을 빨아들인다. 정신 차리면 쉬는 시간이라 옹기종기 흡연장에 모여 대화를 나눌 때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옆에 쭈구리고 앉아 귀동냥으로 열심히 대화의 맥락을 따라간다. 대부분 일이 어디까지 진행되었고, 오늘 내일은 어디까지 진행될 것 같다는 내용이기에 허투루 들을 내용이 없다. 흡연장이 바글바글한 이유가 있다면 있는 셈이다.
자 꺼진 담배 불도 다시 보고 작업 현장으로 돌아오자. 첨벙첨벙, 안전장화를 신고 흙탕물 가득한 도랑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면 유년 시절 노란 장화를 신고 물웅덩이에서 뛰놀던 과거가 떠오른다. 안전고리를 걸고 높은 철골 건물에 올라서면 정글짐에 오르락내리락하던 과거가 떠오른다. 지금은 어른들의 놀이터에서 어른들의 방식으로 노는 셈이다. 정신 수양을 하는데 돈까지 준다.
오늘 하루가 덜 힘들고 행복했으니 내가 이렇게 정신승리할 수 있는 것이리라. 내일은 비가 와서 출근 안 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혹여 출근하더라도 미끄러움에 주의하며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해보자. 내일도 용역은 살아 숨 쉰다.
"안전구호 준비! 안전구호는 '내리는 비 좋아!'하겠습니다!"
"내리는 비 좋아! 좋아! 좋아!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