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쓰고
은영이도, 희정이도, 연숙이도 없다.
이르게 신입사원 연수를 들어가 학교에 안 나오는 친구들, 간간이 들어온 취업 면접차 결석한 친구들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그리워하다가 부러움으로 시선을 거뒀다.
기말고사도 끝났고, 학생 수가 거의 반으로 줄어든 교실에서 더 이상 수업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지 대부분 자율학습으로 채워졌다.
나는 내가 12월까지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가 사준 면접용 춘추복 정장은 얇아서 겨울에는 입을 수가 없게 됐다.
이틀 만에 학교로 돌아온 내게, 반성의 시간을 주고 싶으셨을까? 담임선생님은 나를 추천해 주지 않았다.
나는 수업 시간의 대부분을 이력서 쓰기 연습을 했다.
써봐야 경력이 있길 하나, 자격증 다섯 개(그 사이 펜글씨 자격증을 하나 추가했다.), 거기다 최종 학력이 아직은 중졸이니 내용이 길지도 않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이렇게 쓰다 보면 기회가 오겠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몇 자 안 되는 이력서를 한 획 한 획 쓰고 있으면 마음 수양도 되었다. 그보다 무상무념이 맞겠다.
쓰고 또 쓰다가 손가락이 굳어지면, 가끔 몰래 교실을 빠져나와 매점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누가 출석 중이고, 누가 취업 중인지, 또 누가 오늘 면접으로 결석인지 과목 선생님은 잘 모르셨다.
집에서 챙겨간 커피(커피 두 스푼, 프림마 두 스푼, 설탕 두 스푼)를 종이컵에 타서 친구와 나눠 마셨다.
매점 앞문으로 선생님이 오시는 것 같으면 뒷문으로 살금살금 나갔고, 다시 선생님이 뒷문으로 나오면 다시 앞문으로 들어가 숨바꼭질하듯 잘도 숨었었다. 그때 먹은 조제 커피와 매점에서 산 초코파이의 달콤하고 쌉싸름한 맛의 조합은 선생님 몰래 수업에 빠지는 맛과 같았다.
이력서를 쓰고 또 쓰며 마음속으로 외운 주문이 통했는지, 나는 아슬아슬하게도 겨울방학이 되기 전, 제약회사에 추천 의뢰를 받았다.
높은 빌딩이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면 유리문이 있었으며, 그 안에 화이트 칼라 사람들이 가득한, 내가 꿈꿔오던 직장의 모습이었다.
나는 합격해서 다음 해 1월부터 출근했다.
내가 꿈꿔오던 직장의 현실판은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했다.
열일곱부터 열아홉까지 맹렬하게 일어나던 뜨거운 감정은 그때부터 식기 시작했던 것 같다.
사회는 대체로 차가웠다.
그런데 그때는 뜨거운지 차가운지도 잘 분간하지 못했다.
참 미숙했다.
친구들은 어땠을까?
나처럼 어리숙했을까?
은영아! 희정아! 연숙아!
너희 기억 조각들이 보고 싶다.
사진출처: 영화 '윤희에게'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