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실전 투입!
금융권 취업이 한바탕 휩쓸고 간 교실에는 성공한 애들이 뿜어 내는 과도한 도파민과 실패한 애들의 높아진 스트레스 지수가 섞여 여러 개의 파동이 어지럽게 일렁였다.
아직 반 정도의 애들은 나처럼 여전히 취업을 기다렸다.
나는 은행 취업이 좌절되고 한동안 면접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겨울방학 전에 취직이 돼야 한다. 그래야 긴 겨울방학이 바캉스가 될 수 있다. 늦어도 졸업식 전에는 취직이 돼야 한다. 그래야 가족들 앞에서 면이 선다. 고등학교 3년 동안 학비를 지원한 큰오빠와 큰언니한테 보답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취업이 돼야 했다.
면접만 볼 수 있다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다 가겠다고 마음먹자,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다시 기회가 왔다.
학교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곳에 있는 무역회사다.
사장실에서 면접을 봤다.
이력서를 한 번 훓어보더니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준비된 말을 했다. "네!"
면접은 간단하게 끝났다. 사장은 내가 아니었어도, 누구던 채용했을 것 같았다.
드디어 합격이다. 취업이 된 것이다.
뛸 듯, 날듯 기뻐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러지 못했다.
면접 보자마자 합격, 합격하자마자 다음 날 출근, 비현실적인 상황을 이해할 틈도 없이 어리둥절한 상태로 그곳을 나왔다.
다음날, 등교 버스 522번은 출근 버스가 됐다.
버스에서 등교하는 친구를 보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친구 앞에서 출근하는 모습을 보이는 내가, 먼저 어른이 된 것 같아 소외감이 느껴졌다.
소녀 가장이라도 된 것 같아서 내가 가엾기도 했다.
그렇게 가기 싫던 학교가 지금은 너무 가고 싶었다.
마음이 복잡하게 울렁거려 친구와 조금만 더 길게 눈길을 나누었더라면 아마 왈칵 눈물을 쏟았을지도 모른다.
친구가 잘 다녀오라는 말과 함께 버스에서 내릴 때, 하마터면 따라 내릴뻔했다.
내가 꿈꿔왔던 직장의 모습은 이랬다.
고층 빌딩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십여 층에서 내리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 벽 너머 수십 명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일하고 있고, 그 가운데 내가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현실의 내 직장은 상상과 너무 달랐다.
면접 때는 보지 못한 광경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1층은 물류창고였고, 2층에 사무실이 있었다.
1층 창고에는 마대가 천장높이까지 쌓여 있었고, 몇몇 사람들이 트럭에 마대를 싣는 것인지 부리는 것인지 부산했다. 그곳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계단으로 이어지는 2층에 오르니 문 세 개가 있었다.
그중 하나의 문 옆에 회사 명패가 붙어있는데, 문 윗부분에 아주 작은 창문을 통해 사무실의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사무실에는 책상이 다섯 개 정도 있었고, 사무실 안에 사장실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사무실에는 아버지뻘 되는 부장, 내 업무를 가르쳐줄 큰언니뻘의 여직원이 있었다.
나는 사무실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에게 소개됐고, 누군가 사무실에 들어오면 기계처럼 자동으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사무실 문과 가장 가까운 책상이 내 자리였다. 언니는 바로 내게 일을 가르쳐줬다.
나는 자리에 있는 타자기에 종이를 끼워 떠듬떠듬 타자했다.
사실 뭘 하는지 몰랐다. 앞뒤 설명도 없이 언니는 문장을 불렀고, 나는 타이핑했다.
타자가 완성된 종이를 서류봉투에 담아 나를 데리고 인근 은행으로 향했다.
은행에서 서류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실전을 보여주며 가르쳐 줬다.
나의 주된 업무는, 물건을 수출입 하는 과정에 필요한 인보이스(청구서) 같은 서류를 작성하고, 은행 증빙자료를 만드는 것이었다.
나의 첫 직장, 출근 첫날의 하루는 퍼즐을 맞추기 전 쌓여있는 퍼즐 조각처럼 뒤집혀 있는 것을 바로잡고, 맥락을 알고 싶어 가장자리 조각을 찾아내 겨우 그림의 손과 팔을 연결하거나, 모자에 모자 리본을 연결하듯 시간의 순서도 의식의 흐름도 없는 조각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느새 집에 와있고, 또 어느새 다음날이 돼 나는 출근 버스에 올랐다.
나는 둘째 날 그만두었다.
어디든 가겠다는 마음에는 어디든 이틀 이상은 다니겠다는 다짐까지 포함하지 않았었나 보다.
나는 버스에서 친구와 함께 학교에 가고 싶어 했던 그 마음을 쫓아갔다.
나의 꿈에서 너무 멀어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회사에 대한 실망,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나에 대한 실망을 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를 속이기 위해서는, 회사는 더 나빠야 했고, 나는 더 불쌍해야 했다.
엄마를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학교 밖 사회를 모르는 어리숙한 내게 엄마는, 조금 더 참고 다녀보라고 하지 않으셨다.
내 말을 믿어주신 것이다.
그때, 그 무역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과거를 가정해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그때의 결정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분명하다.
나는 다시 등교했다.
그리고 담임선생님의 불같은 격노를 들어야 했다.
"너 도대체 어떤 회사에 가려고 그래?!?!"
사진출처: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