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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 까봐!

뭐라굽쇼?

by 달게

드디어, 내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은행채용에 면접 기회를 얻었다.

1990년에는 은행보다 인기 있던 곳이 투자신탁과 증권회사였다. 그다음이 시중은행이었다.

그때만 해도 일자리가 많았다. 성적이 어느 정도 되고 자격증을 갖췄다면, 골라 갈 수 있을 정도였다.

6년 후 IMF가 터질 거라고 상상도 못 할 때다.


은행은 기본적으로 채용인원이 많았다. 비례해서 추천 의뢰 인원도 많아 반마다 두세 명씩은 선발했다.

학교로 들어온 기업의 취업 의뢰는 내신 10% 이내, 혹은 30% 이내와 같은 성적 가이드가 있었다. 조건에 맞는 학생을 선발하는 권한은 전적으로 취업 담당 선생님 손에 달려있었지만, 일차적으로 담임선생님의 추천을 받아야 하는 만큼 우리 운명이 담임선생님한테 달린 셈이었다.


소위 상위권 애 중 일부가 면접 기회를 두 번 이상 받기도 했지만, 합격 소식은 없었다. 그 애들은 한 번도 추천 기회를 얻지 못한 애들에게 미안해 죄인처럼 지냈고, 혹여 합격했다 해도 맘 놓고 좋아하지도 못했다. 서로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담임선생님도 반 아이들에게 면접 기회를 골고루 주려고 애쓰셨을 거로 생각한다. 조건이 맞지 않아서 배제됐을 것이고, 조건이 맞아서 여러 번 기회를 주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에서야 이해하는 것이지, 당시에 나는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채용 조건이 철저히 비공개였기 때문에 수군거리기만 하고, 사실을 알아보거나 따질 수 없었다. 그저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불공정의 불씨가 살살 피어오를 무렵 은행채용에 추천을 받았으니 내 맘이 어땠겠는가?

'그러면 그렇지! 우리 담임이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오해한 거야.'


엄마는 서울 명동에 있는 반도패션에서 면접용 정장 한 벌을 사주셨다. 춘추복이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취업이 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교복을 비껴간 세대라 그런지 정장이 정말 어색했다.


면접이 있던 날, 아기한테 어른 옷을 입힌 것 같은 모습으로 은행 본점에 들어섰다.

로비는 높고 웅장했다. 면접 보러 온 학생들이 우르르, 집단으로 이동하면서 내는 소리가 로비에서 메아리쳤다. 면접장에는 우리 학교만 있는 것이 당연히 아니었다. 대기 장소에 도착하니 수십 명의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앞선 학생들이 점점 빠져나가고 내 순서가 다가오는 것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나는 집에서 연습했던 말을 되뇌었다. 성격은 밝고, 명랑하며, MRA 동아리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고, 미술 과목을 좋아하고, 이 은행에 합격하면 성실하게 일하겠으며....


내 순서다. 나를 포함한 열 명이 한 번에 면접장에 입장했다.

길게 붙여놓은 책상에 앉아 있는 면접관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들어서는 모습부터 점수를 매기는 것 같았다. 내가 앉을 의자에 다다르기까지 휙휙 수십 명의 면접관을 지나쳤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보다 한둘 적은 수였다.


그들은 순서대로 자기소개를 시켰고, 추가 질문은 조금씩 달랐다. 나는 혹시라도 대사를 까먹을까 봐 기계처럼 외운 대로 읊었다. 달달 떨면서 말한 것 같다. 내게 추가 질문은 없었다.


마지막 학생까지 인터뷰가 모두 끝나자, 면접관 중 한 명이 질문 대신 우리에게 이상한 행동을 주문했다.

양팔을 앞으로나란히 해봐라, 손바닥을 뒤집어 봐라, 뒤로 돌아서 봐라,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봐라.

급기야 "이마 까봐라!"

이상한 주문에 맞춰 열 명의 학생은 그대로 따라 했다.

시키니까 하긴 했는데, 뭔 면접이 이러냐?

찝찝한 기분으로 면접장을 나왔다.


나는 불합격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내 성격이 명랑하네! 쾌활하네! 동아리가 어쩌고 저쩌고. 괜히 말했다 싶었다.

고상하게 음악감상 좋아하고, 독서가 취미라고 할 것을.

아니다. 관상 때문인가 보다.

세상에 이마를 까보라니!

'내 관상이 어때서?'


억울해하는 내게 엄마는 아버지가 안 계셔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돈 만지는 일이다 보니 아마 신원이 확실한 사람을 뽑을지도 모르겠다며 푸념하셨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아버지의 부재가 이렇게 활용될 줄 몰랐다. 이것도 추측일 뿐이다.

불합격 이유를 찾다가 백가지가 넘을 것 같아 그만 두었다.


은행에서 면접 수고비로 받은 오천 원으로 친구와 롯데리아에 갔다.

데리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이번에는 돈 좀 써서 콜라 대신 밀크쉐이크다.

먹고 잊어버리자!



사진출처: 영화 '관상' 포스터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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