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양가' 집 규수
상업고등학교 3학년 교실은 2학년과 또 달랐다.
리셋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새롭지만 신입생 때는 없었던 예민하고 날카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취업이라는 중차대한 과제가 묵중하게 교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상업고등학교에 온 목적을 잘도 피해 다니다 드디어 맞닥뜨린 것이다.
취업하기 위해서는 기본 자격증을 취득해야 하고, 내신성적도 좋아야 했다. 어느 기업이 어떤 조건으로 추천의뢰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근로조건이 좋고, 이름 있는 기업에 취직하는 것은 모두의 희망이었다.
기본 자격증 급수는 '2233', 다시 말해 주산 2급, 부기 2급, 한글 타자 3급, 영문 타자 3급이다. 학원비는 엄마와 큰오빠, 큰언니에게까지 부담을 지우고 있었다. 학원을 짧게 다니는 것만이 가족에게 보답하는 길이었다. 간절함이 통했는지, 2학년 2학기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 취업에 필요한 기본 자격증을 모두 취득했다.
모두가 출발선은 같았지만, 3학년이 되니 앞서가는 친구, 뒤따라오는 친구, 격차가 벌어져 있었다. 나는 2233을 갖고 3학년에 도착했으니, 이보다 더한 안전장치가 있을까?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며, 자만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따놓은 자격증은 곧 내신성적에 반영됐다. 어떻게? 자격증에 취해 내 급수가 바로 내 실력이라고 착각했고, 내신 공부를 등한시했다. 2233을 갖춘 친구 중에는 주산은 1급으로, 타자는 2급으로 자격증을 업그레이드하기도 했는데, 나는 오히려 있는 성적마저 까먹고 '양가' 집 규수가 되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
어영부영 2학기가 되자 2233은 물론 그 이상의 자격증 부자들이 속출했다.
내가 가진 자격증은 반 평균 정도로 흔해졌고, 성적은 바닥을 찍었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드물게 교무실에 불려 가는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교무실에 불려 간다는 것은 면접 기회를 얻었다는 신호였다.
어느 기업이 추천의뢰가 들어왔네, 누가 추천됐네 하는 말들은 반 분위기를 더 뒤숭숭하게 했다.
나는 빨리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그리고 '양가'집에서 탈출해야 했다.
이러다 취직이 안 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