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컷!
"엄마! 내 졸업앨범 어딨어?"
설 명절 들린 친정집에서, 안방, 마루, 골방, 문간방, 물건이 놓인 곳이라면 어디든 들척이며 엄마 집을 수색했다. 오랜만에 들른 딸이, 그것도 명절에 집을 구석구석 뒤지고 다니면서 어딨느냐고 볼멘소리하고, 그 뒤를 쫓으며 뭘 찾냐고 엄마가 따라오셨다.
"나, 고등학교 졸업앨범. 안 보여."
오래된 물건을 웬만하면 쌓아두지 않고 버리는 엄마지만 자식들 졸업앨범은 그래도 한곳에 모아놓고 긴긴 세월을 시켜주셨다.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있는 것을 기어이 끌고 나와 마루에 펼쳐놨다.
하나하나 호명하듯,
"이건 오빠 졸업장! 오빠! 고등학교 졸업앨범 있어."
큰오빠가 와서 쓱 들여다보고 웃으며 돌아선다.
"어! 이건 큰언니 중학교 졸업앨범."
나는 큰언니 딸을 불러 엄마를 찾아보라며 앨범을 건넸다.
"상장이다. 오! 성적우수상, 위 학생은...." 작은언니 것이다.
나 때문에 모두가 50년에서 40년 전으로 잠깐 돌아갔다.
아무리 찾아도 내 것이 없다.
"엄마! 고등학교 진짜 졸업한 거 맞아요? 증거가 없네요."
딸의 농담으로 실망한 마음을 다독일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졸업앨범에 미련이 남아 집을 뒤지기 시작했는데, 없다.
아무 생각 없이 수십 년을 살아와 놓고는, 지금 이 간절함은 뭔 조화냐.
졸업앨범 못 찾은 아쉬움을 오래된 먼지로 채워갈 때쯤, 나는 잃어버린 졸업앨범보다 더 귀한 보석을 찾아냈다. 바로 반 친구들을 대상으로 돌린 앙케트였다. 오둘둘 블루스에 써온 늦은 일기를 다시 수정해야 하나 싶을 정도의 기억하지 못했던 이야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다.
앙케트를 써준 친구의 이름과 함께 있는 사진을 보자 반가움에 눈물이 다 핑 돌았다. 꼬깃꼬깃하게 접혀있던 앙케트 질문지를 펴고 친구들의 답을 읽어갔다. 혹시라도 종이가 부설 질까 봐 조심조심 넘겼다. 친구의 얼굴, 이름, 별명, 글씨체가 합쳐지면서 노트 위에 친구가 홀로그램으로 등장한 것 같았다.
미정이, 효정이, 혜영이, 경아, 현영이, 정신이, 정화, 보경, 민주, 재경, 은정, 은경이, 선희, 선이, 공자, 은영이, 서영, 진경이. '너희들 진짜 반갑다!'
함께 한 1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에는 대부분이 졸업여행을 적었다. 몰래 마신 술기운을 빌어 담임 앞에서 주정 부리며 야자타임을 했다고, 다시 가고 싶다고도 했다. 미래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는 사뭇 진지했다. 대학도 가고 기자가 되고 싶다고도 했고, 인생관이 뚜렷한 사람, 한다면 끝을 보는 사람,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도 했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로봇태권 V를 조정하는 사람, 사장, 시인, 고고학자, 고르바초프 같은 정치인, 정계를 흔드는 사람, 동시통역사가 돼서 양조위와 유덕화를 만나 유창하게 통역하고 싶다고 했다.
너희들도 몰랐지?
어때? 너희 지금 어디쯤에서 살고 있어?
되고 싶었던 너희로 살고 있니?
이 앙케트 질문은 우문일까?
앙케트 질문 18번에 화답한 친구의 글을 옮겨 적어본다.
18번은 질문이 아닌, 친구들에게 보내는 내 인사말이었다.
친구는,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는 3년간의 시간들!
난 한시, 한때라도 잊지 못할 거야.
3년간의 희로애락, 그래, 난 하고픈 것도 많았고, 아직도, 그것들을 다 이루려면 내가 백 살 아니 이백 살은 살아야 할 거야.
난, 정말 아쉬워, 담임선생님들, 7반 아이들, 내가 가까웠던 사람들.
내 학교, 그리고 가브리엘의 숲.
그래, 정말, 무지무지무지무지!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