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
오전까지는 에어컨 켜지 않고 버텨보기로 했다.
선풍기 두대를 켜서, 회전을 시키고, 실내등 마저 덥게 느껴져 모두 껐다.
베란다 블라인드도 바닥까지 내리고, 거실 커튼도 쳐서 태양 열과 빛을 이중으로 차단했다.
그리고 OTT 켰다.
한동안 무얼 볼까 리모컨으로 화면을 이리저리 옮기다가 오늘 보기에 딱 좋은 영상을 찾았다.
서핑! 파도 타는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세계 서핑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들을 밀착 취재해 그들의 인생과 바다에서 서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상이었다.
하와이 오하우 섬 노스쇼어에서 열리는 파이프라인 경기를 보여주는데, '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부서지는 파도의 물거품이 시원하기도 했지만, 파도의 너울 위를 자신의 키보다 작은 판때기 위해 서서 바다에 빠지지 않고 요리조리, 아슬아슬 균형을 잡는 것은 기본이고, 공중제비를 돌고, 방향을 바꾸고, 파도터널을 통과하는 묘기를 보여줬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하지? 인간은 정말 대단하다.
파도 타는 모습만이 아니고, 서퍼들의 인생 스토리도 재밌었는데, 세계 대회를 수회 우승한 어느 서퍼는 두 살 때부터 엄마한테서 서핑을 배웠고, 엄마는 여전히 서퍼라고 소개했다. 어떤 선수는 아버지가 하는 생선가게에서 주워온 스티로폼으로 보드를 만들어 파도를 타기 시작했고, 이후 서핑대회에 나가 상금을 타 가난한 집안을 도왔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코로나 감염으로 면역질환까지 생겨 2년을 쉬었지만 재기해 다시 우승을 거머쥔 사람도 있었다.
파도타기 자체가 드라마틱한 스포츠인데, 그들의 인생도 그만큼 드라마틱했다.
재기에 성공한 여성서퍼의 엄마가 딸의 도전을 곁에서 간절하게 응원하는 모습, 서퍼 엄마가 두 돌 때부터 가르쳐준 서핑으로 세계대회 우승까지 한 아들 서퍼, 상금으로 가정을 도왔다는 또 다른 우승자까지 나는 머리가 띵! 하며 뭔가 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핑은 젊은이들이, 특히 모험을 즐기는 사람들의 스포츠로만 생각했다.
서핑이 삶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충동적인 경험이고, 취미라고 생각했다. 여름이면 바닷가에 한 번 놀러 가는 정도로 이해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보게 되자, 나는 또 하나의 편협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서핑으로 생활이 되겠어?'
'부모가 보여줬던 삶을 자식이 보고 배운 거잖아. 맹모삼천지교라니까. 뭘 보여 주고, 뭘 보고 크느냐.'
라고 내 입으로 말한 것을 내가 듣고서 또 한 번 띵! 했다.
그건 맞는 말이다. 자식이 부모를 보고 자라는 것은 국룰을 넘어 월드룰이겠지.
서퍼들의 삶은 진정했고, 그대로 나에게 보여줬다. 나는 남의 삶을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위선으로 거리를 뒀다. 다만, 나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된다면, 내가 정해놓은 순위에 들지 않거나 순위에서 벗어났다 치면, 그것은 낙오된 거니, 금지하거나 불허했다. 나와 관련되는 순간 그것은 다양한 게 아니고, 불안정하거나, 충동적이거나, 임시적인 것이 됐다. 내가 정한 순위는 남이 나를 볼 때도 해당한다. 그러나 나는 애초에 순위안에 들어갈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순위밖에 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감추거나 들추지 않거나, 회피하고 제삼자처럼 군다. 쪽팔리고 민망하다.
서퍼의 엄마들을 보다가 띵! 했다.
서퍼들이 먹고살만한지, 그러지 못한지는 내게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에 대해 알아보고 가졌던 편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모른 채로 편견을 깼다.
삶을 비교하지 않고 살고 싶다.
띵! 나를 깨우친 오늘의 바람이다.
진정성과 자부심에 가치를 두고 싶다.
내 안에 순위를 없애고 싶다.
가능할까?
이돌람바! 없어져라. 얍!
대문사진: 영화 '폭퐁속으로' 장면 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