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라 아침에 시간이 많은 아이들과
타샤 튜더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화려한 삶을 살았던 사람도,
대단한 성취를 이루어낸 사람도 아닌
한 여자의 하루가
화면이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나의 마음에 머물렀다
그녀의 삶은 단순했다.
정원을 가꾸고, 빵을 굽고, 그림을 그리며
그렇게 하루라는 시간에 최선을 다하며
나의 삶의 속도로 천천히 살아가는 것.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잘 살아낸다는 건 많은 것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매일'이라는 시간을 사랑하며 보내는 것이라고.
눈이 펑펑 내리고
온 세상이 깨끗해진 오늘.
늘 단정하게 가꾸던 나의 집안 풍경은
아이들의 시간으로 어질러져
짙은 정겨움을 남긴다
그게, 그리 싫지만은 않다
조금은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제멋대로 어질러진 집 안 풍경을 바라본다
나의 삶에 늘 따라다니는 작은 물음표,
어쩌면 그 물음표 때문에 잘 살아내고 있는 건지, 늘 불안했던 날들.
지금 당장 무언가를 이루어내지 못한다 해도
수십 년 뒤에 떠오를 오늘의 나날들은
눈부시게 빛났던 하루는 아닐까
타샤 튜더가 그랬던 것처럼
나의 불안한 물음표는 어쩌면 처음부터 필요 없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집은 아이들의 숨결로 가득 차고
그 속에서 엄마의 발걸음은 조금 더 바빠진다
그렇게 분주하게 흘러가던 집이
잠깐 숨을 고르는 시간.
아이들의 각자의 자리로 흩어지고 난 뒤의 조용한 오전.
거실에는 이미 햇살이 한가득 들어오고
창가에 햇빛이 바닥 위로 천천히 번져간다
늘 고민만 하며 작은 정원으로 사용하던 베란다가 눈에 들어온다
타샤 튜더의 말 때문이었을까.
오랜 시간 동안 적당한 쓰임새를 찾지 못한 채
언젠가 아이들이 독립하고 나 혼자가 되면
이곳은 나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야지, 하며
머릿속으로 생각만 해왔던 그 공간.
미루고 미루다가
기억 속 까마득히 흐려진 작은 꿈.
아직 아이들이 독립하려면 더 시간이 필요하지만
왠지 더 이상 미루고 싶지가 않아 졌다
아이들이 자라 내 품을 떠나는 날을 마냥 기다리기보다
그 시간을 향해 내가 먼저 나아가는 것도 괜찮을 거야.
그래서 작은 한 발자국을 내딛는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내가 직접 조립해 주었던 아이들의 작은 책상이
그 쓰임새를 다하고 베란다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작은 스티커가 붙어있는 낡은 책상.
시간이 지나며 생긴 작은 흠집들이
이상하게도 자꾸 눈길을 붙잡는다.
아이들의 어린 손이 남긴 흔적들이라 그런지
볼수록 귀엽고 애틋하다.
그 낡은 책상 위에 나의 새로운 시간을 얹어 보기로 했다.
한 번도 제대로 만져본 적 없는 목재를 덜컥 주문했다.
제대로 못이나 박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지만
시작했으니 뭐라도 해보고 싶었다.
낯선 일 앞에서는 늘 조금 망설인다.
올해 떠오르는 해를 보며 다짐했던 것처럼
무모하게 도전해 보기로 한다.
그중에서도 칠하는 것만큼은 자신 있지.
주문한 목재에 스테인을 칠한다.
스테인 색깔을 고르는데 고민이 많았다.
다행히 막상 칠해보니 참 마음에 들었다.
이곳은 내가 좋아하는 어두운 색을 쓰기로 했다.
오직 나만을 위한 곳이니까.
낡은 오븐을 빼버리고 인덕션을 설치하면서부터
내내 방치되어 있었던 곳.
언젠가는 선반을 만들어야지, 생각만 하다가
이번에 목재를 주문하면서 함께 주문했다
슬라이딩 선반을 넣으면 조금 편하지 않을까.
뚝딱 설치하고 나니
그동안 왜 미루었을까 싶다.
조미료가 한눈에 보이니 한결 편리해졌다
나의 오랜 친구와 같은 낡은 부엌.
삐그덕 대는 곳이 많은 친구지만 조금만 더 함께 가자.
문을 달아줄까 하다가
작은 커튼을 달아보기로 한다
결혼할 때부터 나와 함께한 재봉틀.
아이들이 어렸을 적엔
두 아이의 육아를 온전히 혼자 책임져야 했기에
혼자 지치는 날이 많았다.
아이들이 낮잠에 들면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참 많은 것들을 만들었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힘들다고 불평하면서도
늘 아이들의 옷을 지었던 날들.
지나고 나서야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힘들었던 나를 위로해 주었던
작은 친구가 이렇게 아직 내 곁에 남아있다.
작은 커튼을 달았다.
조금은 엉성해 보이기도 하다.
뭐 어떤가.
부족하면 다시 만들면 되고,
조금씩 나아지면 되는 것이니.
한참 모자란다고 해서
이제는 더 이상 미루지 않으려 한다.
엄마의 자리와
나라는 사람의 자리가
조용히 함께 숨 쉬는 공간.
나를 다듬고
내가 다시 시작되고
엄마라는 사람이 잠깐 숨을 고르는 곳.
언젠가 완성될 '나의 곳'을
오늘도 조금씩 만들어 어간다.
아주 천천히.
내가 살아가는 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