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아파트에 살면 이것저것 고칠 것들이 꽤 많이 나온다. 수도꼭지마다 녹물을 거르기 위한 필터를 설치해야 하고, 틀어진 창틀을 메꿔 여름에는 모기를, 겨울에는 황소바람을 차단해야 해며, 가끔씩 역류하는 세면대를 뚫기도 해야 한다. 이런 일은 약간의 힘과 간단한 장비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대체로 가족 내 남자들이 하는 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우리 집의 경우는 대부분의 경우 내가 한다.
우리 집은 웃풍이 너무 세다. 이사한 첫날부터 웃풍 때문에 코가 시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여기저기서 사정없이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동네 슈퍼에 있는 문풍지를 종류별로 구입하여 온갖 바람구멍을 다 막았다.
“현관문 위쪽이 제일 많이 들떠있네. 그러니 바람이 숭숭 들어오지. 남편, 이것 좀 올려서 붙여봐요. 아니 아니 위쪽 말이에요. 아래쪽 말고요”
“여기? 아, 거기 말 하는 거였어?”
현관문 꼭대기까지 손을 뻗으려 안간힘을 쓰고 나니 팔도 아프고 발가락에 쥐가 날 지경이다. 문풍지 작업이 끝날 무렵이 되면 헉헉거리며 숨도 거칠어진다. 이렇게 내가 애쓰며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남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꿔다 놓은 보릿짝 마냥 그냥 가만히 서서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기만 한다.
“와, 이제 한결 따뜻해졌네. 근데 신문물이 있다니, 기술 좋다. 이런 물건은 어떻게 알았어?”
“마트에 가면 다 있어. 추운데 뭔들 못 찾아서 막겠어?”
남편이 해맑은 모습으로테두리를 메꾼 현관문을 새로 설치한 문짝인 양 신기하게 쳐다본다.기운이 쭉 빠진다. 힘든 작업을 한 마누라를 보고 하는 첫마디가 신문물이고 어쩌고라니! 키 큰 남편이 좀 하지 말이야. 그리고 수고했다는 한마디 해주면 어디 덧나나? 그래, 좋게 생각하자. 덜덜 떨며 지내느니 누구든 빨리 추위를 막는 게 낫지.라고 생각하며 지나갔다.
또 다른 골칫거리인 녹물제거 필터통을 설치할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물을 쓰는 곳마다 필터통을 달아야 하는데, 세탁기에 설치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세탁기와 수도 호스의 연결부위를 풀어서 필터 통을 달 때 나사를 풀고 조이고 하는 과정에서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사용후기를 보니, 많은 경우에 구입은 마누라가, 설치는 남편이 한다고 했다.
“남편! 이거 좀 달아봐요.”
“어, 이거 어떻게 해요?”
“설명서 있잖아요. 읽어 보세요. 잘 모르겠으면 이 동영상 보고 해 봐요.”
“이렇게 하는 건가?”
“아니 아니, 그거 아냐. 설명이 그렇게 안되어 있잖아요. 저리 비켜봐요. 이렇게 돌려서, 이쪽으로 껴 넣어야지요.”
“아. 그렇구나”
남편 손에 있던 필터 통은 어느 사이에 내 손으로 옮겨져 있었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필터 통과 세탁기 호스를 연결하여 스패너로 나사를 조이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은 또 내가 작업하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이었다.
“오! 됐다. 이제 물 안 새고 잘되네. 마누라 진짜 잘한다. 재능 있어. 마누라.”
음...... 이거 뭔가 좀 이상해. 나만 계속 뭔가 힘든 일을 하는 것 같네. 수리할 것들이 생기면 내가 도맡아 고치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남편이 할 수 있는 것까지 내게 슬쩍 밀어버리는 것 같다는 의심도 들었다. 분명 대학 다닐 때 아르바이트로 자동차 공장에서 가지각색의 일을 했었다고 했는데, 그때의 능력은 어디 갔는지 물건 고치는 일에 이렇게 소극적일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나의 재능을 운운하는 것이 집안일하기 귀찮아서 그러는 것 같아 보였다.
공장에서 일하던 능력은 어디 갔느냐고 물어봤다. 남편은 일당이 높아서 한 것이지 만드는 쪽에는 취미도 능력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뭔가를 고치는 모습을 보면 자신에게 없는 재능이라 너무 신기하다고 했다. 듣고 보니 귀찮아서 내게 일을 미룬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 좀 미안하긴 했다. 정말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누라는 공대에 가지 그랬어?”
“나? 수학 못 해서 못 갔지. 다음 생에는 공대 한번 도전해 볼까?”
적극적으로 집안일을 좀 했다고 공대까지 언급하며 나를 추켜세워주는 남편의 과한 칭찬에 그래 난 엄청난 재능을 가진 것 같다 하며 맞장구 쳐주었다. 나에게 일을 미루는 것 같다는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못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