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티스트 앙드레아, 『그녀를 지키다』를 읽고
열여섯 살의 비올라는 직접 만든 날개를 등에 메고 지붕 끝을 향해 달려나간다. 아무도 의사를 묻지 않고 처음 본 남자와 약혼을 발표당한 날, 자기 생일 파티에서. 비올라는 날기 위해 뛰어내렸다. 당연히 추락했고 심하게 다쳤다. 나는 그 장면을 읽으면서 비올라가 어리석다는 생각을 단 1초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를 억압하는 모든 것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한 애처로운 몸부림이었다.
『그녀를 지키다』는 단 4권의 작품으로 프랑스 주요 문학상 19개와 공쿠르상까지 받은 장바티스트 앙드레아의 소설이다. 원래 영화감독이었다가 40대에 소설가로 전향한 사람인데, 글인데도 그림이 보인다는 게 읽는 내내 느껴진다. 이탈리아의 오렌지 농장, 황혼이 지는 피에트라달바, 먼지가 일렁이는 조각 공방. 1904년부터 1940년대까지, 세계 1, 2차대전과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배경이다. 영화감독으로 다져진 시각적 감각이 문장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녹아 있어서 Le Monde는 "정적인 예술인 조각을 동적인 언어인 문학으로 완벽하게 번역해냈다"고 평했다. 글을 읽는데 돌 깎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소설이다.
주인공은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 애칭 미모다. 조각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왜소증이었다. 아버지는 행정 실수로 전쟁에 징집되어 사망했고, 어머니는 어린 미모를 먼 친척 알베르토 삼촌에게 맡기고 떠났다. 삼촌은 조각가였지만 재능이 없었다. 미모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삼촌은 그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가장 먼저 착취했다. 미모가 받아야 할 임금을 가로채고, 혹사시키고, 무시했다. 세상은 미모에게 처음부터 두 개의 이유로 친절하지 않았다. 왜소증이라는 이유와,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럼에도 미모는 조각을 멈추지 않았다. 삼촌이 없는 틈을 타 귀한 대리석을 몰래 조각했고, 그 작품이 오르시니 가문의 눈에 들어 귀족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기도 했다. 세상이 미모를 짓밟으려 할수록, 미모의 손은 더 정밀해졌다.
미모가 자신을 '미모'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애칭이 아니다. 그의 본명은 미켈란젤로다. 르네상스의 거장, 시스티나 예배당을 그리고 바티칸의 피에타를 만든 그 미켈란젤로와 같은 이름이다. 미켈란젤로가 신의 섭리를 대리석에 구현했다면, 미모는 자신의 결핍과 비천한 출신을 예술의 재료로 삼는다. 완벽한 신성함이 아니라 깎이고 상처 입은 인간의 진실을 조각하는 것. 타인이 비웃으며 붙여준 멸칭을 스스로 선택한 이름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세상이 정한 기준 위에서 살지 않겠다는 조용한 선언이다.
그는 돌을 깎는 법을 배우기 전에, 자신의 고통을 존엄으로 바꾸는 법을 먼저 깨달은 인물이다.
미모는 결국 조각가로 이름을 알린다. 왜소증이라는 편견을 온몸으로 버티며, 삼촌의 착취에 시달리며, 피렌체로 로마로 수주를 받으러 다니며. 세상이 그의 조각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미모의 조각은 돌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돌의 결을 손으로 느끼며 그 안에 숨겨진 형상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작은 손이 어떤 거장보다 섬세하게 감정을 새겨넣을 수 있었던 건,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했기에 오히려 사물의 본질에 더 깊이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읽으면서 이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미모가 남자가 아니었어도 가능했을까? 왜소증이어도 남자였기 때문에 재능을 증명할 무대 자체가 존재했다. 미모의 왜소증은 세상이 넘어야 할 장벽으로 세워둔 것이었다. 그 장벽은 험했지만, 넘을 수는 있었다. 비올라의 이야기는 달랐다.
비올라 오르시니. 피에트라달바 일대를 지배하는 유력한 오르시니 가문의 막내딸이다. 미모와 비올라가 처음 만나는 게 담력 시험으로 갔던 묘지에서, 열두 살 때였다. 이 둘이 친해지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사회가 '비정상'이라고 밀어낸 존재들끼리는 말이 없어도 통하는 게 있다. 비올라는 귀족 가문의 딸이면서도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 없었다. 여자아이가 지식을 쌓을 이유가 없으니까. 아버지의 서재에서 몰래 책을 훔쳐 읽으며 자랐고, 미모에게 글을 가르치고 책을 빌려줬다. 매일 끝날 것 같지 않은 노동만 하던 미모가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었던 건 비올라 덕이었다. 미모가 돌을 깎는 기술과 직관을 가졌다면, 비올라는 그 돌에 담길 의미와 철학을 제공했다. 프랑스 평론가들이 비올라를 "미모의 손에 영혼을 불어넣은 연금술사"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런데 비올라에게는 무대가 없었다. 부유한 귀족 가문의 딸이었는데도. 비올라의 여성성은 세상이 아예 들어오지 말라고 잠가둔 문이었다.
열여섯살의 생일 파티에서 처음 본 귀족 남자 아이와 약혼을 발표당한 날, 비올라는 직접 만든 날개를 메고 지붕 위에서 뛰어내린다. 죽으려고 한 것이 아니다. 비올라는 언제나 하늘을 나는 것을 갈망해왔고 (비행선에 관한 논문이 쏟아지고 비행에 성공한 사람들이 나오던 시기였다.) 그걸 이루기 위해 많은 논문과 기사를 읽으며 자신만의 이론을 다듬어왔다. 하지만 결국은 떨어졌고 크게 다치게 되며 정신적으로도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비올라는 추락하고 나서 시를 썼다.
나는 우뚝 선 여자다. 당신들이 일으킨 화염 한가운데에
나는 우뚝 선 여자다, 내가 보이는가, 당신들의 화형대, 처형대에 올라간 내가, 당신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내가
나는 우뚝 선 여자다, 당신들의 야유가 쏟아질 때 울리라고 생각했는가, 연기처럼 자욱하게 피어나는
당신들의 비겁함, 당신들의 화형대, 처형대, 당신들의 지목하는 손가락.
그 사과를 깨문 뒤로 뭔가가 나를 부추긴다, 놀랍지 않은가
춤추고 로켓을 발명하고 당신들을 돌보고 싶은 욕구가
그런데도 나를 불태우려나,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나
검은 고양이와 구속복, 찢긴 나, 당신들은 내가 미쳤다고, 조금은 마녀 같다고, 혹은 그 둘 다라고 말하리라
나는 사과를 깨물었다, 나는 계속 그걸 깨물 테다 각오하라
나는 우뚝 선 여자다, 나는 무릎 꿇지 않는다.
나는 당신들이 일으킨 전쟁 한복판에 우뚝 선 여자다
나는 당신들 주위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 당신들이 부르는 여자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자마자 당신들이 불태울 여자이며 혹시라도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내가 보게 될까 봐
당신들은 나를 재로 만들어 사방에 뿌려 버리리라, 아니, 당신들의 불은 뜨겁지 않고 아무것도 태우지 못하니 당신들은 그저 그런다고 생각할 뿐
나는 우뚝 선 여자다, 나는 당신들만큼이나 귀하다.
아직 태어나지 않는 네게, 상처를 받는 것이
예기치 못한 일이 닥쳐 무너졌다 다시 일어서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네게
그들은 포기하라고, 잠자라고, 누우라고 요구할 텐데
네 입을 다물게 하고 널 구슬르고 네 무장을 해제하려고 들 텐데
나는 우리보다 앞섰던 다른 많은 여자들처럼 우뚝 선 여자다
나는 우뚝 선 여자다, 그리고 너 역시 그러리라.
이건 추락한 사람의 절망이 아니었다. 뼈가 부러진 열여섯 살이 쓴 글인데 온도가 분노이고 선언이었다.
시 안에 이브가 등장한다. '그 사과를 깨문 뒤로'라는 구절. 이 이미지가 수천 년 동안 어디에 쓰여 왔는지 우리는 안다. 세상에 나쁜 것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여자 때문이라는 논리. 그러니까 여자는 조신해야 하고, 욕망을 품어서는 안 되고, 더 알고 싶다거나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위험하다는 논리. 비올라는 그 논리를 정면으로 받아친다. 그래, 나는 사과를 깨물었다, 계속 깨물 것이다, 각오하라고. 죄를 인정하는 게 아니다. 죄라고 불리는 그 욕망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마녀 얘기도 나온다. 검은 고양이와 구속복. 지식을 가진 여자, 목소리를 높인 여자, 정해진 역할을 거부한 여자에게 역사가 붙여온 딱지. 비올라는 그게 자기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 쓴다. 그리고 이 시의 마지막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로 끝난다. 비올라는 자기 이전에도 같은 화형대에 세워진 여자들이 있었고, 자기 다음에도 같은 싸움을 할 여자들이 있을 것을 알았다. 그것을 아는 열여섯 살이었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가장 잔인한 것은 악인이 없다는 사실이다. 오르시니 가문의 남자들을 보면, 파시스트 정권과 손을 잡고 권력의 길을 걷는 둘째 스테파노도, 교황의 신임을 받으며 종교계에서 올라가는 셋째 프란체스코도 딱히 나쁜 사람이 아니다. 프란체스코는 오히려 형제들 중에 가장 합리적이고 비올라를 이해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문의 이익을 위해 비올라를 희생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다. 잔인한 건 그것이 그에게 희생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거다. 여자란 원래 그렇게 쓰이는 것이었으니까. 그 시대에, 그 사회에서. 악의가 없어도 가장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억압이 있다. 오르시니 가문의 이야기가 무서운 건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어서다. 평범한 사람들이 아무 의심 없이 굴리는 시스템이 한 사람을 평생 가두어놓을 수 있다는 것. 그게 이 소설이 아주 조용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나중에 비올라는 선거에 나선다. 여성이 선거에 나가던 시대가 아니었다. (법으로 금지되지는 않았기에 비올라는 그 점을 파고든다.)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고 지지를 얻으며 국회의원이 되려 한다. 당선이 유력시되지만 '돈'만을 추구하는 무리들로 인해 목숨이 위험해진다. 그러자 미모가 말한다. 그만두라고, 위험하니까, 같이 떠나자고. 미모는 비올라를 평생 사랑했다. 그녀의 비범함이 빛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왔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그녀를 지키기 위해' 그녀를 막는다. 나는 이 장면이 마음에 오래 걸렸다. 미모가 몰라서 그랬다고 생각한다. 미모는 왜소증으로 편견을 버텼지만 그래도 결국 조각가로서 자신을 증명했다. 싸움 끝에 결과가 있었다. 비올라는 달랐다. 귀족 여성으로 겉으로는 존중받으며 살았지만, 자신이 가진 재능 중 단 하나도 제대로 써본 적이 없었다. 선거는 비올라한테 그냥 정치적 도전이 아니었다. 평생 처음으로 '나'로 서는 일이었다. 그걸 잃는 것과 목숨을 잃는 것이 비올라한테는 같은 무게였다. 그러니까 그만두라는 미모의 말은, 아무리 사랑에서 나온 말이라도, 비올라한테는 또 하나의 잠긴 문이었을 것이다.
비올라는 평생 하늘을 날고 싶어 했다. 라이트 형제가 막 가능성을 증명하던 시절, 비올라는 논문을 뒤지고 이론을 공부하며 직접 비행 기구를 설계했다. 프랑스 비평지 Lire는 이 집착을 "육체에 갇힌 영혼이 시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반란"이라고 표현했다. 땅 위의 삶은 신분, 성별, 가문이라는 중력에 묶여 있다. 비올라에게 비행은 그 모든 지상적 제약을 단번에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미모는 비올라와 정반대의 방향을 향했다. 하늘이 아니라 돌 속으로. 가장 무거운 물질인 대리석을 파고들며 그 안에서 영혼을 끄집어냈다. 비올라가 수직(하늘)을 향해 솟구치려 했다면, 미모는 수평(대지)의 돌을 깎았다. L'Express는 "두 평행선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그들이 함께 만든 조각상이었다"고 썼다. 미모가 만든 피에타에는 비올라가 그토록 원했던 자유의 에너지가 담겼다. 전통적인 피에타가 성스러운 슬픔을 박제했다면, 미모의 피에타는 살아있는 고통과 날것의 사랑을 담았다. 비올라가 하늘로 날리지 못한 꿈이, 미모의 손을 통해 돌 속에서 영원히 떠 있는 존재가 되었다.
소설의 원제는 'Veiller sur elle'이다. 프랑스어로 '그녀를 지키다'인데, 여기서 '그녀(Elle)'는 여러 겹이다. 비올라이기도 하고, 미모가 평생 만든 조각상이기도 하고, 평론가들에 따르면 격동의 시기를 겪은 이탈리아(Italia) 그 자체이기도 하다. 미모가 만든 피에타는 결국 교황청에 의해 외딴 수도원에 감춰진다. 바티칸이 이 조각을 보고 경악하며 숨기려 했던 이유는 "지나치게 인간적인 생생함"이 종교적 엄숙함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너무 강력한 것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처리된다. 보관이라는 이름의 봉인, 보호라는 이름의 감금. 비올라도 그렇게 처리되어 왔다. 가문의 이름으로,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마지막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모가 노년에 수도원에서 조각상 곁을 지키는 것은, 비평가들 말대로 사실 조각상이 미모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전쟁, 파시즘, 신체적 비하 속에서도 그를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준 것이 이 조각을 완성하고 수호한다는 목적의식이었으니. 그러니까 '그녀를 지키다'는 지키는 이야기이면서, 끝내 온전히 지켜지지 못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904년부터 1940년대. 여자가 책을 읽을 자유, 직업을 가질 자유가 없던 시대가 불과 몇 세대 전이다. 지금은 그 당연함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느껴지지 않는다. 비올라가 지붕 위에서 날개를 메고 뛰어내릴 때 목숨을 걸었던 것이, 나에게는 공기처럼 일상이 되어 있다. 나는 책을 마음 놓고 읽고, 직업을 가지고, 내 이름으로 무언가를 한다. 비올라는 그것을 꿈꿨다. 그리고 시를 쓰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네게, 라고 했다. 나는 그 편지를 받은 사람이다. 이 당연함이 누군가의 추락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걸. 아직도 잠긴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걸. 그리고 그 문을 잠근 것이 악인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게 이 책이 준 가장 무거운 생각이었다.
_나는 우뚝 선 여자다, 그리고 너 역시 그러리라._
비올라가 백 년 전에 쓴 편지의 마지막 문장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게,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