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 발신] 현금인출 1,000,000원 씨유 ATM 잔액 1,380
김오락씨는 오늘도 야근을 마치고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은 드디어 용산 전자상가에 가서 최신형 게임기를 구매하는 날이다. 함께 구매할 타이틀은 당연히 '파이널 판타지 7 리메이크'다.
"티... 티파짱. 딱 하룻밤만 더 기다려줘. 내일 구하러 갈게."
김오락씨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드리웠다. 이 날을 위해 몇 달간 휴가까지 반납하며 열심히 일해 왔다. 내일이면 4K HDR 60 fps의 티파짱이 내 눈앞에 살아 숨 쉴 것이다.
그 순간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자메시지가 왔다.
[Web발신]
[**카드 현금인출] 김오락 01/16 23:48
1,000,000원 씨유 ATM 잔액 1,380원
'뭐지?'
황급히 일어나 지갑을 봤더니 신용카드가 없었다. 저녁 먹고 회사 동료들과 들렸던 카페에서 카피 값을 계산한 뒤 카드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김오락씨가 놓고 간 카드를 누군가(A씨) 주워서 그 카드로 ATM기에서 현금을 인출해 간 것이었다.
"사요나라.."
티파짱이 수줍은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며 사라지고 있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바로 내일을 위해 몇 달을 개처럼 일하며 돈을 모아 왔건만.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용서할 수가 없었다. 김오락씨는 놈을 반드시 처벌받게 하리라 다짐했다.
김오락씨는 계좌에서 돈을 인출해 간 놈을 처벌받게 할 수 있을까?
절도죄는 i) 타인 소유, ii) 타인 점유의, iii) 재물을 절취한 경우 성립하는 범죄이다.
신용카드는 어떨까? 신용카드는 형체가 있는 물건이므로 형법상 '재물'에 해당한다. 또한 김오락씨 소유물이므로 A의 입장에서는 타인의 재물이다. 그렇다면 카페 위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물건을 '타인이 점유하는 물건'으로 볼 수 있을까? 만일 타인의 점유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A는 절도죄 보다 가벼운 점유이탈물횡령죄로 처벌되는데 그친다.
점유란 원래 물건을 '사실상 지배'하는 경우를 의미하지만 우리 법원은 점유의 개념을 보다 넓게 인정한다. 반드시 소유자의 점유일 필요도 없고, 물건을 반드시 몸에 지니고 있을 필요도 없다. PC방에 두고 온 지갑을 몰래 가져간 경우 그 지갑에 대한 PC방 관리자의 점유를 인정하여 절도죄로 처벌한 사례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위 신용카드는 여전히 카페 관리인(주인 혹은 점원)의 점유 아래 있는 것이므로 A의 입장에서는 타인의 점유물을 절취한 것이다. 따라서 A가 김오락씨의 신용카드를 가져간 행위는 점유이탈물횡령죄가 아닌 절도죄로 처벌받는다.
A는 절취한 신용카드를 사용해 ATM에서 현금 1,000,000원을 인출했다. 위 현금 1,000,000원 역시 형체가 있는 물건이며 김오락씨의 소유물이므로 타인소유의 재물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위 현금은 누구의 점유에 있는 것일까? 우리 법원은 ATM 관리자의 점유를 인정하여 절도죄가 성립한다는 입장이다. 즉, ATM 기계를 관리하는 누군가가 존재할 것이고, 비록 그가 현재 현금을 들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남의 신용카드로 멋대로 현금을 인출해 가는 것을 그 관리자가 알았더라면 이를 허락할 리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의 카드를 이용한 무단 현금인출은 ATM 관리자의 의사에 반하여 그의 점유를 배제하고 현금을 절취한 행위로 본 것이다.
따라서 A는 김오락씨 소유의, ATM 관리자의 점유물을 절취한 것이므로 A에게 위 신용카드에 대한 절도죄뿐만 아니라 위 현금 1,000,000원에 대한 절도죄도 별도로 성립한다.
한편, 형법과는 별개로 여신전문금융업법상 신용카드부정사용죄라는 범죄가 있다. 본 죄는 분실하거나 도난당한 신용카드나 직불카드를 사용한 자를 처벌한다. 그러나 우리 판례는 "신용카드를 그 본래의 용법에 따라 사용한 경우에만" 본 죄의 처벌대상으로 본다. 신용카드를 그 본래의 용법에 따라 사용한다는 것은 신용카드의 신용대출 기능(신용카드 결제, 현금서비스 등)을 이용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판례 대로라면 현금 인출만을 한 A씨는 본 죄의 처벌 대상이 아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 법원은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음식점이더라도 범죄의 목적으로 들어간 경우 영업주의 추정적 의사에 반하므로 주거침입죄가 성립한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즉, 만일 영업주가 범인이 범죄 목적으로 자신의 매장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출입을 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 명백하므로 주거침입죄가 성립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2022년부터 대법원은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음식점에 영업주의 승낙을 받아 통상적인 출입방법으로 들어갔다면 설령 범죄를 목적으로 출입하였거나, 영업주의 추정적 의사에 반하더라도 주거침입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여 기존의 태도를 변경하였다. 주거침입죄를 판단함에 있어 다른 부수적 요인들을 제거하고 침입당시의 행위 태양 자체가 주거의 사실상 평온을 해치는지 여부만 고려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시점 기준으로 A가 만일 절도를 할 생각으로 위 카페에 들어간 것이라고 해도 누구나 출입이 허락된 카페에 일반적인 방법으로 들어간 것이므로 주거침입죄는 성립하지 않는다.
요새 스마트폰을 이용한 결재 시스템이 상용화되면서 머지않아 신용카드도 구시대의 유물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신용카드를 이용한 결제 시 신분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는 거래 현실을 고려할 때 신용카드를 절대 분실하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한다.
이 글을 통해 꼭 기억해야 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의 신용카드를 주웠다면 절대로 사용하지 말고 즉시 반환할 것. 민사상 책임은 물론이고, 신용카드에 대한 절도죄뿐 아니라 인출한 현금에 대해서도 절도죄가 성립하며, 두 개의 절도죄의 경합범으로 더욱 중하게 처벌받게 될 것이다.
둘째, 신용카드를 분실했는데 누군가 사용했다면 당황하지 말고 가까운 경찰서에 신고하자. 범인을 찾아내어 돈을 돌려받는 것은 당연하고, 형사상 책임을 묻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