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척학과는 없나요?
너는 아무래도 공학박사가 아니고 척척박사가 맞는 것 같다.
연구실에서 가장 친한 선배에게 들었던 말입니다. 워낙 저와 티기타카도 잘 맞고 대화를 많이 한 선배라 어떤 의미로 척척박사를 사용했는지 바로 알아들었었어요. 그 선배와 저는 다른 '결'의 박사였거든요. 제가 연구실 동료들을 보면서 깨닫게 된 두 가지 종류의 박사님들이 있습니다. 바로 공학(전공) 박사와 척척박사입니다.
너 이렇게 하면 척척석사밖에 더 돼?
대학원생 시절 석사생인 후배들을 놀리곤 했던 말입니다. 척척박사는 하도 일상에서 많이 써서 익숙한데 척척 석사는 어색하지 않나요? 어쨌든 척척박사는 이것저것 다 알고 있는 사람한테 하는 말이죠. 특히 학위를 하지 않은 분들은 '박사'라는 단어를 의외로 자주 사용하세요. 어떤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분이나, 그냥 일반적인 상식이 풍부한 사람들에게도요. 하지만 저희처럼 학위를 했던 사람들은 감히 박사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정말 그 학위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을 주변에서 너무 많이 봐서 리스펙 하는 의미에서요. 석사로 졸업하는 후배들에게도 '척척박사' 대신 '척척석사'라고 하는 것처럼요. 그 후배들에게 척척박사라고 하는 건 '다시 박사생으로 입학해!'라는 뜻으로 '우리와 (이 지옥에서) 좀 더 함께 하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조금 치사해 보이려나요? 그래도 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신분으로 워라밸이 최악인 환경에서 6년 넘게 공부한 사람들을 존중하는 의미로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학위를 받기 위해 제 전공에서도 한 세부분야, 그 안의 수많은 물질 중 하나에 대해서만 몇 년 연구하고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박사님들은 결국 자기 분야 빼고는 바보라는 거예요. 다들 '박사'하면 왠지 본인 분야뿐만 아니라 조금 유사한 분야나 다른 분야에 대해 물어봐도 다 알 것 같은 막연한 기분이 들지 않으세요? 저도 학위를 진행하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박사님들은 본인이 연구한 '딱' 그 주제 외에는 (과장해서 표현하면)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정도 유사한 분야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아는 것이 많으시지만 그 이상의 전문적인 지식은 알지 못해요.
예를 들어서 제가 종이배접기학 박사를 받았다고 가정해 볼까요? 그중에서도 저는 돛단배 접기에 대해서 연구를 해서 졸업을 했다면, 저는 종이학 접기에 대한 지식은 일반인과 비슷해요. 뭐, 보트 접기 정도는 일반인보다 좀 더 알고 있겠죠? 하지만 종이비행기 접기나 개구리 접기 같은 건 그냥 제 동생보다 모를 수도 있는 거예요. 거기다 심지어 종이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나 실제 배의 구동 원리, 제작 과정 같은 건 그냥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과 비슷한 지식수준 일 것입니다. 어떤 느낌인지 감이 좀 잡히시죠. 여기서 공학박사와 척척박사가 나뉘게 됩니다. (저는 공학박사를 가지고 있으니 일반 박사님들을 그냥 공학박사라고 지칭하겠습니다.)
다시 연구실 선배 이야기를 해볼게요. 그 선배는 대표적인 '공학박사' 케이스입니다. 그냥 논문 귀신이었어요. 본인 분야에 대한 논문은 거의 매일 서칭을 해서 새로운 논문에 대한 내용을 파악하고 있고, 그와 조금 유사한 (위의 예시대로면 보트 접기) 내용까지 본인의 주제를 위해 함께 공부를 하는 정말 '전공'박사님입니다. 그래서 저도 제 주제에 대해 그 선배와 제일 많이 이야기를 했었어요. 심지어 제가 연구하는 물질에 대해 그 선배는 거의 몰랐었는데도요. 다른 사람이 보면 다 비슷한 물질 아니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전공자들 입장에서는 돛단배 접기와 개구리 접기 정도로 다른 내용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선배에게 연구 내용에 대한 조언을 구했던 이유는 제 연구의 방향성에 대해 다시 확인하고 공학분야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분석법과 그 결과 해석에 대해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냥 생활력 제로에 본인 전공 말고는 하나도 모르는 바보였어요. 사람에 따라 어떻게 보면 교양, 어떻게 보면 상식이라는 범주 안에 있는 내용에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었거든요. 갑자기 생각나는 최근 에피소드를 하나 이야기해 드릴까요. 몇 년 전 그 선배는 미국에서 포닥을 하기로 결정하고 출국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상대적으로 해외여행 및 해외 생활의 경험이 그 선배보다 많은 제가 보기에는 참 귀여운 발상이었는데, 가서 먹을 라면을 사려고 마트에 갔다는 거예요.
"라면 가져가려고 지금 마트 와서 라면 왕창 사가는 중"
"가서도 살 수 있는데 뭐 하러 사가려고? 그렇게 가져갈 짐이 없어?"
그 순간 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하나. '미국은 돼지고기 반입 안 돼서 웬만한 라면은 못 가지고 들어갈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웬만하면 반입 안 하는 걸 추천한다는 수많은 인터넷 글이 있더라고요. 괜히 가서 뺏기면 아깝기도 하고, 요새 하도 입국심사가 까탈스러워져서 괜한 트집 잡히지 말자라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결국 그 선배는 그렇게 많은 라면을 부모님께 그대로 드리고 털털 미국으로 갔습니다. 여기서 하이라이트는 제가 웬만한 전열기구는 프리볼트 제품이 아니니 가서 사라고 이야기하는 걸 깜빡했더니 드라이기고 고데기고 바리바리 챙겨가서 고이 모시고 있는 상태인 지금입니다.
뭐 이런 걸로 '생활력 제로에 본인 전공 말고는 하나도 모르는 바보'라고 하는 거야 하실 수 있지만 이런 에피소드가 차곡차곡 쌓여서 그 사람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 이 사람한테 척척박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 기준에서는 이 선배는 포닥가서 공부를 좀 더 한 다음에 교수님이 되어 훌륭한 후임들을 양성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분들이 전공 분야에서 큰 일을 해내시는 분들이에요. 전공 지식부터 인생과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까지 두루두루 섭렵하셔서 방송이나 강연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유명한 이야기꾼 박사님들과는 다른 스타일인 거죠. 제가 생각하는 척척박사가 바로 이런 이야기꾼 타입의 박사님들이십니다.
대학원생일 때는 해가 지고 난 후에 별을 보면서 퇴근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어느 때처럼 밤 9시쯤 기숙사로 가는 길에 하늘을 보니 오리온자리의 허리띠를 이루는 별 세 개가 선명하게 보이더라고요. 저희 학교가 꽤나 산에 있었거든요. 그걸 보고 '저 세 개 연속으로 있는 별 찾으면 그게 오리온 자리야. 그게 오리온자리 허리띠거든.'이라고 이야기해 주니 그 선배가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아냐고 너무 신기해해서 제가 더 놀랐던 기억도 있습니다. 오리온자리 찾는 것은 상식이 아닐 수 있죠, 꼭 알아야 하는 정보도 아니고요. 하지만 저는 그런 사소한 지식들이 좋았습니다. 그런 내용이 제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고 이렇게 일상에서 직접 경험하고 발견하는 것이 좋았거든요. 그때 제가 오리온자리를 몰랐다면 마냥 '퇴근길에 별이 밝네.' 정도로만 기억했겠지만, 저는 오리온자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그 퇴근길의 밤하늘이 기억나는 것 같아요.
제가 추구하는 추구미가 어떤 것인지 어느 정도 감이 잡히실까요?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생각해 보니 저는 상당히 욕심쟁이인 것 같습니다. 그냥 제 일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싶어요.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일상을 살고 똑같은 장면을 마주해도 그 장면을 이루고 있는 개체들에 대해 아는 것이 있다면 그 순간이 저에게는 의미 있게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모든 분야를 제 전공처럼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많이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그것을 마주쳤을 때 반갑게 인지하고 그 만남을 계기로 다양한 사고를 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