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 지금 생각하니까 아무것도 아니네
저는 한 학기 휴학하긴 했는데 토플 학원을 다녔어요.
여러분은 인생의 휴식기를 가져본 적 있으신가요? 아마 저처럼 30대 삶을 살고 있는 분들에게는 인생의 휴식기를 가질 기회가 몇 번은 있었을 거예요. 예를 들면, 대학교 휴학하기, 취업에 성공하고 회사 첫 출근 전 마지막 쉬는 기간, 이직 후 새로운 회사에 출근하기 전 짧은 휴식기 등이 있겠네요. 그중 어떻게 보면 가장 부담이 없으면서도 어려운 게 휴학이 아닐까 싶어요. 저도 한 학기 휴학하긴 했는데 그 기간 동안 토플 학원을 다녔어요.
저는 사실 '빠른 년생'입니다. 빠른 년생 아시나요? 요새는 사라졌는데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빠른 년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월, 2월생 아이들이 한 해 일찍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예를 들어서 2000년 2월 생이면 원래는 2000년 9월 생인 아이들과 함께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하지만 1999년 9월 생인 아이들과 함께 초등학교 1학년으로 입학할 수 있었어요. (찾아보니까 2003년 생부터 없어진 제도라고 하네요.) 어쨌든 저는 길면 1년 짧으면 2달은 일찍 태어난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시간을 세이브했다고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지극히 효율을 중시하는 저는 이왕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시작한 공부 '휴학이란 없다'란 마인드로 대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대학생활 중 제가 해외교환장학생이라는 걸 새삼 깨닫고 '교환학생 갈래!'를 결심한 건 바로 3학년 2학기였습니다. 이게 문제였는데, 저희 학교 규정 상 마지막 학기는 무조건 본교에서 마무리해야 하고, 제가 교환학생으로 가고 싶었던 미국의 University of Michigan은 이미 한 학기 전에 교환학생 선발을 완료했습니다. 그럼 한 번 계산해 볼까요? 제가 3학년 2학기 때 교환학생을 결심했던 그 순간에는 이미 4학년 1학기 교환학생 선발이 완료되었고, 결국 4학년 2학기 교환학생 선발을 준비해야 하는데, 마지막 학기는 학교에서 보내야 했으니, 어? 저는 이미 기간을 놓친 거였어요. 여기서부터 저의 고뇌가 시작됩니다.
'휴학을 할까?'
'아니야 선발인원이 정해져 있어서 휴학하고 지원해도 떨어질 수도 있는데 괜히 시간낭비 아닐까?'
'그래도 대학생 때만 할 수 있는 활동인데.'
'교환학생 가면 생활비는 어떻게 하지, 외국 나가본 적도 없고 토플은 무슨 토익 시험도 본 적이 없는데.'
30대가 된 지금 한 학기 휴학하는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그 당시에는 왜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한 학기 휴학까지 하고 교환학생 준비를 했는데 만약 선발에서 떨어진다면?'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거든요. 이런 제가 그 당시에는 엄청난 도박이었던 한 학기 휴학을 결심했던 이유는 '지금이 아니면 못하는 경험' 그 한 가지 때문이었어요.
교환학생이라는 경험은 제가 다시 대학교에 입학하지 않는 한 당장 다음 학기 휴학을 해야지 경험할 기회라도 얻을 수 있는 활동이었습니다. 제가 휴학을 하냐 안 하냐에 따라 제 인생의 한 포인트가 달라지는 거였어요.
1. 휴학을 안 한다 - 교환학생을 갈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대학교를 4년 만에 졸업한다.
2. 휴학을 한다 - 토플 공부를 한다 - 교환학생에 합격한다 - 미국 생활을 한다 - 대학교를 4년 반 만에 졸업한다.
3. 휴학을 한다 - 토플 공부를 한다 - 교환학생에 불합격한다 - 대학교를 4년 반 만에 졸업한다.
보시는 것처럼 제가 교환학생을 가기 위해서는 휴학을 한다는 선택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선택을 머뭇거렸던 건 휴학까지 하고 교환학생을 준비했는데 불합격해서 그 휴학한 한 학기가 무의미 해질까 봐였습니다. 하지만 정말 교환학생에 떨어진다고 해서 제가 그것을 위해 노력한 한 학기가 무의미한 시간인가요? 실제로 저는 교환학생을 가기 위해 휴학한 한 학기 중 두 달은 옆 도시의 대형 토플 학원에 가서 매일 수업을 들으면서 하루 종일 토플 공부만 했고, 그 외의 시간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매일매일 토플 모의시험을 치면서 토플 목표 점수를 얻는데 매진을 했습니다.
이렇게 노력했는데 교환학생에 합격하지 못하면 아마 당장은 허무하긴 했었을 거예요. 분명 그 당시에는 '아 시간낭비했어.'하고 우울해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교환학생을 합격한 인생을 살고 있고 그때 고작 그 반년이 아까워서 휴학을 하지 않았다면 교환학생을 다녀와서 얻게 된 외국 생활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혼자 외국 여행을 다녔던 경험, 대학원생 때 싱가포르에서 1년 가까이 파견 연구를 했던 경험도 얻지 못했을 거예요. 제가 노력해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긍정적인 스노볼도 굴러가려면 몇 년은 더 있어야 했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시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화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에요. 하지만 이 '시간'이라는 가치는 단순히 수치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 하루 복잡한 일이 있었다고 가정해 볼까요? 집으로 가는 길에 택시를 탈 수도 있고 터벅터벅 걸어갈 수도 있겠네요. 만약에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산책을 하는 과정이 나의 이 복잡한 머리를 깨끗하게 비워준다면, 집에 30분 늦게 도착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반대로 나는 빨리 집에 가서 씻고 누워서 유튜브 보는 게 이 복잡한 머리를 정리해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면 택시비가 얼마가 나오든 빨리 집에 가는 게 본인의 시간을 아끼는 일입니다. 집에 간다는 그 목표를 이루는 데 걸리는 시간도 중요하지만, 내가 이 복잡한 기분에 휩싸여서 아무것도 못하고 버리는 시간이 생기는 것, 그게 바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거든요. 차라리 돈을 더 들이거나 집에 좀 늦게 가더라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찾아서 실천하는 게 전체 인생에서 보면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한 거라고 볼 수 있겠네요.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저는 대학생활을 그렇게 재밌게 보내진 않았어요. 막 잘 놀지도, 그렇다고 엄청 열심히 공부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제가 휴학한 한 학기가 무용지물이 될까 봐 두려운 마음에 교환학생 지원을 시도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제 인생에서 큰 기억에 남지 않은 대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좀 낭비했을 수도 있겠네요. (물론 그 인생을 살고 있는 저라면 나름의 의미를 또 찾았을 거예요. 그게 인생의 주인공인 내가 해야 할 의무거든요.) 하지만 한 학기 휴학을 하고 토플 학원에 다니면서 (제 인생 첫 학원입니다.) 다양한 이유로 토플 공부를 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매일 KTX 타고 옆 도시로 달려가서 공부를 하는 이 경험은 학교라는 작은 사회를 벗어나게 해주는 시작점이었습니다. 또 그렇게 다녀온 교환학생은 제 인생을 전반적으로 바꿔준 경험이었습니다.
제 동생은 마이스터 고등학교를 나와서 대학 진학을 하지 않고 바로 취업을 했습니다. 대학원에 다니는 누나보다 빨리 경제생활을 한 똘똘한 동생이에요. 처음에 이 친구가 마이스터 고등학교를 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걱정하셨어요. 혹시라도 나중에 동생이 대학교에 가고 싶어 할까 봐요. 마이스터고 특성상 대학진학을 안 하는 조건으로 장학금을 받는 거라서 대학교에 진학하면 일이 복잡해지거든요. 대학교를 가려면 고등학교 졸업 후 2-3년은 지나야 됐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제가 동생이랑 부모님께 했던 말이 뭐냐면요.
엄마, 쟤 나이에서 2-3년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야. 애가 회사 다니다가 대학을 가고 싶어 하면 그때 보내주면 되지. 설마 박사까지 한 누나가 있는데 동생 대학 등록금 하나 못해주겠어? 거기다가 애가 대학 안 가고 있던 2-3년 동안 논 것도 아니고 회사 다니면서 사회생활을 했는데! 저 나이대에 사회생활까지 한 애들 많이 없어. 쟤는 그동안 누구보다 다양한 경험을 했을 거고 그렇게 보낸 시간은 전혀 아깝지도 않고, 다른 사람에 비해 뒤처지는 것도 아니야.
제 한 학기 휴학도 벌벌 떨면서 했는데, 남일이라고 막 얘기하냐고 말씀하실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동생이랑 나이차이가 좀 나서, 동생이 고등학교 갈 때는 제가 교환학생 다녀온 후였습니다. 그래서 그 한 학기 휴학을 하고 얻게 된 교환학생 경험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았기 때문에, 본인의 인생을 위해 그 정도 시간을 투자하는 건 좋은 선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이후였죠.
여러분, 시간은 정말 소중하고 귀한 것이 맞아요. 하지만 그 소중한 시간을 단순히 숫자로만 정리해서 사용하지 말고, 어느 때, 어떤 순간, 누구를 위해서 쓰는 시간인지 한번 판단 요소를 더해보는 건 어떠세요?